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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중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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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진 0 2,842 2002-02-16 14:29
우리는 지금까지 의가 무엇이며 성화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 중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상태가 중생에 대한 것입니다. 중생을 모르고 칭의나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키려 하고 옷을 입히려 하며 음식을 먹이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말하려면 중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하는 중에 이미 중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다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는 중생에 대한 가르침을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 왜 중생이 필요한가?

중생이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한번 태어났다는 뜻이 그 말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 태어난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계시합니다. 한번 태어난 것은 죄와 사망의 나라 곧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로 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앞 장들에서 누누이 말한 대로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사망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며, 그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에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이 생명 자체로 탄생하셔서 마지막 아담이 되시고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태어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아담 안에서 다 죽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다 창조하기 이전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고 존재 자체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있게 한 대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필요성입니다.

2. 중생의 방법

예수님은 밤에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 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와 나눈 이 말씀이 기록된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참으로 어떤 것입니까? 모든 대답은 성경에서 얻어야 합니다. 인간의 추측이나 세상적 사물로 해석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오류가 끼여들게 됩니다.
학자들은 물이 침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참된 중생은 침례를 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참으로 중생한 사람이 침례로 그것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전혀 중생 하지 않은 사람도 형식적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침례 받은 것은 중생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1) 물로 난다는 뜻.
물이 침례를 뜻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물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상징하는 것도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같은 사실을 뜻하는 것인데, 물은 침례를 뜻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위의 말씀들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씻기는 물로 하는데 깨끗하여지는 것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물이 말씀을 상징하는 것을 깨닫는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은 물 침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거듭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가르칩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들은 말씀이지요. 거듭나는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나는 것인데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가르치는 표상적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하여서도 물이 필요합니다. 태아는 복중(腹中)에서 양수에 떠 있지 않습니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태어나기 위하여 물이 필요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일에도 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썩지 아니할 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물을 예수님의 부활과 또한 침례와 관련시킵니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또한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모든 구원에 대한 말씀들이 의미를 지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가능하고 그 구원이 바로 사망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중생은 그렇게 옮기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고 침례는 그렇게 옮긴 사실의 실제적인 선포를 뜻하는 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과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고 말합니다. 침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예한 사실을 선포합니다. 부활에 참예한 것은 곧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례를 합니다. 그래서 머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립니다. 의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형식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형식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형식주의와 형식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주의는 나쁩니다. 그러나 형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내용은 그 내용을 바르게 나타내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을 잃어버리면 내용이 담길 그릇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용이 빠지고 형식만 남았을 때 그것을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침례는 형식주의가 아니라 침례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지는 바른 형식입니다. 침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뜻하는 예식입니다(롬6:1~7). 그런데 죽은 자에게 죽은 사실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호흡이 없어졌을 때입니다.

아무리 뇌사를 해도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곧 호흡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침례의 의미에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즉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죽은 것을 물 속에 잠가 호흡을 멈추는 것으로 표상 합니다. 확실히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위로 나와서 호흡을 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호흡하게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침례의 형식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로는 이 내용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거듭남의 근거입니다.

2) 성령으로 난다는 뜻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뜻하는 말입니까?
위에서 말한 대로 물은 성령도 상징합니다.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자신도 생명이십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그처럼 거듭나는 사람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그 생명을 우리가 성령께로부터 받는 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생명의 성령입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은 이 예수님의 참 생명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심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아담의 후손에게 심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말씀을 우리에게 심어 주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거듭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성경 말씀과 상관없이 일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역시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말씀이 일치하는 것을 친히 말씀해 주십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므로 성령과 말씀을 일치 시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시고, 성령은 이 말씀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하시므로 이루어지는 재창조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창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1장 1절 2절입니다.

창1:1,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 곧 성령께서 수면 곧 물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령과 물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창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곧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창조에 성령께서 일하시고 물위에 운행하셨던 것처럼 재창조 곧 구원에도 성령께서 물위에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위에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에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십니다(고후4:6). 이것은 첫째날 창조에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창조되기 전의 혼돈하고 공허한 모양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흙이 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이 생명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에게 역사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役事)에 사망 집행이 유예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 빛을 받아들이면 생명으로 나는(出生)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출생의 측면에서 표현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탄생하신 의미를 아담의 후손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3) 실제적으로 중생 하는 길
중생이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침례도 가르치는 것이며, 성령으로 나는 것도 성령께서 말씀 안에 역사 하사 말씀으로 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알았으나, 이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중생이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여 가슴이 뜨거워지고 몸이 화끈화끈하고 방언이 터지면 그것이 성령을 받은 것이고 중생 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 중생의 경험에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도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기록된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성경이 가르치는 중생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의 실제적(practical)인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입니까?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루어진다고 계시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을 알면 거듭나는 실제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혈통, 육정, 사람은 다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후손으로 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담의 후손으로 난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께로 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라는 말은 "아네르( )"인데, 이것은 남녀를 다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남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남자 곧 아담의 후손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즉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영접합니까?
영접하는 것은 모셔들이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들여야 거듭납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하고 듣고 문을 열어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어떻게 영접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방법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거듭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다음 말씀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요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또한 말씀입니다(요1:1, 요일1:1, 계19:13).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것은 전적으로 똑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처럼 기록된 말씀 성경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육신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성경 말씀이 나를 통하여 육신이 되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 말에 거하라고 표현하십니다.

요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에 거하지 않으면 예수를 죽이려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계속하여 읽어 내려가면, 이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요8:43,44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면 마귀의 자식이 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즉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는 일에 정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전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요. 이 사람들이야말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태도가 안타까워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영접하여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영접하여 그 말씀이 전적으로 나를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예수님 밖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서 서로 대적하며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말틴 루터에게 이 말씀을 물었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시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나는 예수님 밖에 있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은 내 밖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되는데요."
루터의 대답은 고금의 명답입니다.
"숯에 불이 벌겋게 붙었습니다. 불이 숯 안에 있습니까, 숯이 불 안에 있습니까?"
"글쎄요, 숯이 불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불이 숯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요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게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곧 그분의 모든 말씀이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모두 말씀을 영접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연결되고 보니, 이것이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벧전 1:23의 말씀을 보증하는 말씀이지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우리 인격을 주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도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것만 하셨고, 행동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사언행(思言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셔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자기가 없는 삶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서 사언행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참된 인격입니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사람되어 오실 때에 자기를 비웠습니다(빌2:5~8).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여 결국 자기 존재와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구원 얻은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정되어 있는 일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 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바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의 일을 하시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통하여 그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이 전적으로 우리를 주장하게 할 때에 이렇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을 새 언약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계명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은혜 아래 있는 것을 아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보아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히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정신)이 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그 정신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이 말은 결국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예수님 마음이 되었고, 그의 정신도 예수님 정신이 되었으며, 그의 생각도 예수님의 생각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그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며 습관은 품성을 형성한다는 말은 유명한 말이 아닙니까! 결국 생각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이룬다는 말씀이지요.
노아 때에 세상이 패괴(悖壞)--패괴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입니다. 이것은 어그러질 패자와 무너질 괴자입니다.--하게 된 것은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그 생각대로 세상이 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악한 생각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창6:5,11,12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거듭난 사람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요, 그 행위도 예수님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그들의 생각이며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기록된 말씀 성경이 우리를 통하여 육신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지요. 저는 이것을 성경 화육론(聖經 化肉論)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이 전적으로 그의 생각이 된 사람 이것이 거듭난 사람이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그의 생활을 전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요.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는 죄와 그 위험성과 감사치 못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기도도 했고, 고민도 하고, 금식도 하고, 각오도 해보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오랫동안 묵상도 해 보았고, 열심히 봉사도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거듭거듭 실패하였고, 능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해결 방책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계속 실패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로서 갖는 특권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내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예수 안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음을 확신했으나 그것을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생겨나지 않았고, 또 그것을 활용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고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온 한 글귀가 내 눈을 뜨게 했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얻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실하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안에서 쉼으로만 얻을 수 있다네... .'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는 그의 몸의 한 부분이며, 그의 육신과 뼈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실 수 있으며, 그의 뜻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향기 있는 사람. 서울, 두란노 서원 간. 1995. p.136.).
우리는 참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계시게 하고 내가 예수 안에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이 전적으로 나를 주장하고 내 생각과 생활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잠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3. 중생의 결과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말씀이 그를 전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말, 그리고 생활이 다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영이라고 합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이며 그들 자신이 바로 영이 된 사람입니다. 영은 영의 생각을 하고 영의 말을 하며 영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요.
육체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누누이 설명한 아담의 후손의 상태를 깨달았으면 다 이해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유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육에 속한 자는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도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말해야 할는지도 모르겠군요. 즉 성령께서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렇게 성령이 없는 자 곧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육체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생명의 말씀으로 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있으며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입니다. 이와 같이 영이 된 사람들은 영이 사는 방법으로 사는 길밖에 달리 사는 길이 없게 됩니다.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말하고 영으로 생활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에게서 난 상태에서 마지막 아담 곧 둘째 사람이신 예수께로부터 다시 났기 때문입니다.

고전15:45~49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 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다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영은 영으로 살고 육은 육으로 산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롬8: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곧 중생한 사람은 육체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영이기 때문에 영으로 삽니다.

롬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들, 곧 영의 사람들은 생활에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살지 않고 예수께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일을 하시면서 삽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하시는 바로 그것이 나타난 것과 꼭 같은 상태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후5:13~16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육체대로 아는 데서 영으로 아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다만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8:7). 그러나 영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뿐 아니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히8:10).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듭난 사람은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같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성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요1:13). 이렇게 말씀으로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을 예수님은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신성에 참예했기 때문입니다.

요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썩어질 것 곧 아담의 후손의 상태에서 썩지 않을 씨로 태어나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신의 성품"이라고 한 말씀 중에 "성품"은 품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품성을 케렉터(character)라고 말하면 개념이 더 분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에 "성품"은 character가 아니고 nature입니다. 이 말은 본질(本質)이라는 말씀이지요. 헬라어로는 "푸시스( )"인데,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품성이라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품이라는 말도 벧후 1:4 외에는 신약성경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구약성경에는 성품이라고 번역된 말이 17회 있는데, 15회는 네페쉬( )를 번역한 말이고, 2회는 루악흐( )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두 낱말에 대하여는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익숙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페쉬는 영혼이라고 번역되었고 생명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루악흐는 생기라고 번역되었고, 영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에게 신명기 6장 4절을 인용하시면 우리말 성경 신명기 6:4에 성품이라고 한 것을 우리말 성경 신약에서는 목숨이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로는 푸쉬케( )입니다. 그러니까 성품은 목숨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는 푸시스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본질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신성의 본질에 참예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것이지요.
거듭난 사람은 신성의 본질을 예수 안에서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인 것처럼 가지가 된 우리도 본질에 있어서는 포도나무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사실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신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 본질이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고후5:21). 우리를 이와 같은 본질로 재창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분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며 이것이 거룩이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렇게 재창조되었으니 그런 사람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 곧 중생한 사람에게는 세속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한 인격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중생한 인격뿐인 것입니다. 중생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그 중생의 생명이 나타내는 생태가 있을 뿐입니다. 그 생태(生態)가 바로 성경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제 중생과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잠깐 설명하고 이 글을 끝을 맺어야 할 것같습니다.
생각하면 사실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하나님의 아들(눅3:38)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모든 사람을 지으셨는데, 아담이 한 사람의 생명도 낳기 전에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창조 안된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여 아담 안에서 지음을 받은 모든 아담의 후손이 아담 안에서 창조 안된 것과 같은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를 헛되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 이 여자의 후손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태어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태어나는 사실의 표현입니다. 그 결과 그는 자연스럽게
아들이 됩니다. 이것은 권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또한 집안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집안의 귀한 자식으로 태어났어도 죽으면 더 이상 자식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는 부활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아들은 생활을 합니다. 산 사람이 생활이 없다면 그것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모든 산 사람은 그 생명이 생태로 나타나는 생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결국 중생, 아들, 칭의, 성화라는 말은 한가지 사실을 여러 측면에서 표현하는 말일뿐입니다. 진정으로 중생 하였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영생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이며, 그들이 영생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 생명이 나타내는 삶을 이루게 되는 데 그 삶이 바로 거룩한 것입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구에도 사람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대로 영생하도록 하셨으나 아담이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자기의 진정한 선택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선택을 하였기 때문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속죄의 관점에서만 설명해 왔기 때문에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속죄의 관점이란 우리의 지은 죄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신다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지만 성경의 복음의 핵심은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여 있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게 한대로 있지 않는 것은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한대로 있기를 거절한 것을 없도록 처리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그 핵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진정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이 경배는 생명과 존재를 주신 사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사람들에게 즐겁게 그 일을 하도록 안식일을 주시고 그 날에 생명의 실상을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에는 안식일이 있으며, 창조로 생명과 존재를 주신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께 생명의 호흡이 연결되어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의 끝 책인 계시록에 속죄 중심의 복음 기별에서 창조 중심의 복음 곧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세천사의 기별은 이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며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서 예수님의 재창조의 경험을 한 중생한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그 생각과 생활을 전적으로 말씀이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밖에 없습니다. 그에게는 종교적 모자와 세속적 모자를 바꾸어 가며 쓰는 일이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세속과 신앙이 따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 한 사람이 언제나 영의 사람입니다. 사슴은 산에 있으나 들에 있으나 시장에 나오나 언제나 사슴일 뿐입니다. 그처럼 중생한 사람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시장에서나 언제나 영의 사람일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그 생명이 일원적이며 그 생명이 나타내는 생태로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러한데(요일4:17),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우리도 예수 안에서 그와 같습니다

.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세상까지 오직 그 한 생명 한 인격이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