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복음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성 화

  Trackback

고무진 0 3,002 2002-02-16 14:30



우리는 지금까지 의가 무엇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어떤 것인지를 연구했습니다. 설명이 복잡해서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만, 의는 하나님이 하신 창조와 재창조 곧 구원, 곧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생명을 누리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반드시 다음 단계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성화입니다. 성화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많은 질문에 부딛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성화가 우리에게도 완전히 이루어집니까? 이런 질문은 교회 안에 아주 많은 것같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우리가 노력하면 예수와 같이 된다는 우파와,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니까 그저 주의 자비와 긍휼을 믿고 살면 주께서 다 해 주신다고 말하는 좌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전혀 죄가 없이 완전할 수가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처럼 완전하게 살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구원과 의에 대한 문제를 도덕성에서 찾기 때문에 일어나는 논란들입니다. 근본은 내어버리고 결과를 가지고 다투는 모습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와 꼭 같다면 어떻게 죄가 없이 완전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여자의 후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했다면 이미 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존재들이고 예수님은 썩지 않을 씨 곧 생명 자체로 사람에게 잉태하셔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결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그 상태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살라고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여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을 얻어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거듭난 상태로 탄생하셔서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지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본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생한 사람들의 본이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본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본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죽어 있기 때문이며 또 그 죽은 자들은 아무런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썩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성화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을 노력해서 성화 되도록 창조하시지 않으십니다. 성화의 상태로 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은 이미 완전하고 거룩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불완전하고 거룩하지 않은 상태로 창조하여 창조된 아담이 노력해서 완전하고 거룩하여지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지음을 받던 날에 모든 일에 완전하고 거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창1:31)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합1:13)는 분이라고 계시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눈에 심히 좋았던 아담이 불완전하고 거룩하지 못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거룩하지 않은 상태로 재창조된다고 어떻게 감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요 인간이 자기들의 사고 방식으로 생각하기 좋은 대로 해석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 또 사단의 속임수가 끼여들었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4:24)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새로운 피조물을 죄 있는 피조물로 창조하시거나, 거룩하지 않는 상태로 창조하신다면, 죄와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것과 같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람도 그렇게 재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는 이미 완전하고 성화 된, 곧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렇게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이렇게 완전하고 거룩한 상태를, 이 불완전한 사망과 죄의 세상에서 더럽히지 않고 이그러지지 않도록 본존하고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존하고 지키는 것은 점점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므로 성화 되어 있는 것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날 곧 평생토록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죄의 세상, 썩어지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썩지 않는 생명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넉넉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은 근원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는 없습니다. 죽어 썩는 자에게 무슨 스스로 행하여 얻는 생명이 있겠습니까? ㄱ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생명과 상태를 순종하는 생활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약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들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 가운데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이 두번이나 나타납니다(21,24). 그래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다고 착각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이 행함은 믿음의 결과라는 말이지 믿음이 없이 행하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신 사실은 창세기 15장 6절에 있는 말씀이요, 그때는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제단에 드린 일은 창세기 22장에 있습니다. 그때는 이삭이 이미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22장에서 행함으로 확인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라합의 사건도 같은 일입니다. 라합이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의 정탐꾼을 숨기는 행함을 담대하게 했던 것입니다. 라합이 우연히 인간적 동정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자기 나라를 배반하여 망명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그들을 숨겨 주었다면 그 행위가 의롭다고 여기는 행위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확신한 믿음이 그 나라의 정권을 개의치 않고 그들을 숨겨 주는 행함을 했을 뿐입니다. 그 행함은 라합의 믿음의 결과이지 의를 얻기 위한 행함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두 사람의 행함은 도덕적인 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나 혹은 정신적으로 지킨 일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의 일은 도덕적으로 보면 부도덕한 일들입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도덕적일 수 없습니다. 자기 나라를 적군에게 팔아 넘기는 일도 도덕적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그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세상적 가치관이나 도덕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을 유일의 행함으로 여기는 믿음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근본적으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야고보는 또한 행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나타내는 자비와 동정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성품인데,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정말 믿는다면 생활에 실제적인 행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이미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생명의 모습이 생활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의 생활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무리 믿는다고 큰소리쳐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은 믿음이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 죽은 믿음도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매장하거나 화장하거나 수장하지 않습니까? 생존 세계에 그는 이미 없는 자입니다. 그와 같이 새 생명의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믿음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라이거나 인형일 뿐입니다.
결국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여 진다는 야고보의 기별이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며 이 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 한대로 설명하면 새 생명이 더럽혀지지 않게 보전되는 삶이며,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되므로 거룩하여 진 상태를 계속적으로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그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 곧 성화를 계속 지켜나가는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에 그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 성경에서 보여준 성화의 표본들을 찾아보겠습니다.

1. 성화의 표본 성소와 성전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옛날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소와 성전은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표상이 됩니다.
모세를 통하여 만들게 한 하나님의 거처인 성소에 대하여 출애굽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소는 사람이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셨습니다. 그것을 모세에게 계시로 보여주시고 그대로 만들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분부대로 모두 만들었습니다.

출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25: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출39:42,4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꼐서 명하신 대로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성소는 사람이 설계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재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사람이 계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을 사람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누누히 설명하였지요. 그러므로 성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를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설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소는 또한 구원받은 사람의 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소는 재창조된 사람이 어떠함을 가르쳐 주는 실물 교훈인 것입니다.
성소는 구원의 역사(役事)에 대한 계시인 동시에 구원받은 사람의 상태에 대한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소가 완성되고 헌당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하였습니다. 모세도 감히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40:33~35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광야의 성소가 가장 거룩한 때가 있었다면 이렇게 완성하여 헌당한 바로 그때일 것입니다. 그 후의 성소의 역사(歷史)는 더럽혀지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성소를 정결케 하여야 했고, 그런 정결 예식이 행하여진 후에 성소는 다시 처음의 거룩을 회복하였습니다.

레16:16,19,20,30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 같이 할 것이요,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속죄일에 성소를 정결케 하는 예식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 예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죄의 때가 묻는다는 것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결케 해야 합니다. 성소는 이러한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는 일 곧 속죄를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실물 교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결하게 된 후의 성소는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소가 계시하는 같은 진리는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계시되고 있습니다. 성소를 친히 설계하여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지을 성전도 친히 설계하여 다윗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소나 성전이 똑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구원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의 행동이 들어갈 틈은 전혀 없습니다.

대상28:10,19 그런즉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소의 전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하라.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이 설계해 주신대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언약궤를 성전 지성소에 들여놓음으로 성전의 모든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히 나타났습니다.

왕상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 성전도 성소와 같이 이 때가 가장 거룩한 때였습니다. 이 후로는 성전도 더럽혀지는 역사(歷史)의 연속이었고 해마다 정결케 하는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요아스 때에는 성전이 퇴락 하여 보수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왕하12:4~15).
성소가 헌당 되었을 때가 가장 거룩하였던 것처럼 사람, 곧 아담의 후손, 썩어질 씨로 태어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그분의 재창조에 의하여 중생 하므로 썩어지지 않는 씨로 태어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때가 가장 거룩한 때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면 성화로 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손에서 방금 창조된 순간과 같이 순결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사는 세상은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아 완전한 상태로 살던 에덴 동산같이 순결하고 거룩한 세계가 아닙니다. 죄로 물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새로운 피조물이 그 순결하고 거룩함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새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아야 합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피로 값을 주고 산 새로운 피조물인 사람들을 그 새롭고 거룩한 상태에서 더럽혀지지 않도록 능력으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 때에 바로 거룩한 존재, 곧 성화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화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거나, 성화 되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화 된 사람으로써 그 성화를 지켜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다른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2.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여주는 성화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 그의 생활은 성화가 어떤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담의 후손이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탄생하기 위하여 구태여 성령의 도움을 빌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지만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신이 되는 일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아담의 후손들이 어떻게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인데, 예수께서 성령으로 나신 것과 같은 상태로 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첫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그가 새로운 아담으로써 스스로 피조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으로 모태에서 탄생하신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어떠하다는 것을 계시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거듭난 상태로 탄생하셨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거듭난 상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탄생하신 것과 같은 상태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중생과 예수님의 장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갓난아이로 태어날 때부터 거룩하셨습니다.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셨기 때문에 "나실 바 거룩한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나면 "난바 거룩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그를 33배나 거룩하여지게 하는 삶이 아니라, 나실 때 완전히 거룩한 그것을 한 점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지키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결코 더럽히지 않고 지켰습니다.

요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아무도 예수님을 죄로 책잡을 수 없었습니다.

요14: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 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세상 임금 마귀는 죄를 발판으로 사람과 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책잡힐 일이 근본적(생명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예수님께 관계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거룩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예수 안에서 단번에 얻은 거룩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대속자와 중보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거룩을 더럽히면 다시는 속죄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출생부터 거룩하고 완전하였고 생활의 매 순간마다 그 거룩과 완전을 조금도 더럽히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갓난아기 때 예수님은 100% 거룩했습니다. 그와 같이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여전히 100% 거룩하셨습니다. 그가 33년을 사시는 동안 언제나 100% 거룩을 유지하시며 한 점의 오점도 묻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생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어떠한 것이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 곧 거룩은 점점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순간에 완전히 거룩하게 태어나서 그 거룩을 평생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3. 성화와 죄를 짓는다는 것

예수님은 탄생하면서부터 성화 되신 분이시며, 전 생애를 통하여 결코 한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는데,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얼마나 자주 죄를 짓습니까? 우리는 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같이 승리하지 못합니까? 죄를 결코 짓지 않는 단계에 나아가야 성화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문은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한 답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믿음은 승리에 대한 기쁨이 있는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로 탄생하여 근본적으로 전혀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이 탄생하셨지마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담의 생명 곧 사망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 가운데 죄의 법이 스며 있습니다.

롬7:22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아담 안에서 얻은 사망의 생명이 죄를 경험한 몸의 유전과 그 유전이 경험하는 경험의 법입니다. 이 법은 마음의 법이 아니라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겠지요?
담배를 오래 피운 사람은 그의 세포 속에 담배를 피운 경험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담배를 계속 요구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를 믿고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살아갈지라도 얼마 동안은 담배 피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며, 그럴 때에 옛날 친구를 만나서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피울 것을 권하면 그 유혹은 물리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지체 속에 있는 담배의 법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 담배 아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곧장 그것을 후회하고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주님의 능력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은 약한데 담배 한대 태웠다고 무슨 죄가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태연히 담배를 피운다면 그는 거듭난 경험이 없이 아직도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을 증거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중생한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이처럼 과거의 죄의 경험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혹시 더럽혀지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피가 항상 씻어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즉시 100%의 거룩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평안이요 의요, 거룩인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이런 사실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입학하고 생활관(기숙사)에 입사를 합니다. 사감 선생님이 모든 입사한 학생들에게 생활관 생활 규칙을 설명을 하고 각 방마다 100점을 줍니다. 그리고 매일 방 검사가 있으며 검사 결과에 따라 감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월말에 그 검사 결과를 발표하며, 결과에 따라 상벌이 있고, 다시 처음과 같이 한 달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똑같이 100점을 받고 시작합니다. 이 점수는 사감 선생님이 주신 것이지 학생들이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100점짜리 방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만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100점을 매일 잘 유지하여 감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 달이 되어 매일 검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어떤 방은 70점입니다. 어떤 방은 40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방은 90점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대로 모두 감점이 되었습니다. 만점을 유지한 방은 한 방도 없었습니다. 다 감점을 받았는데, 많이 감점 된 방과 조금 감점된 방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사감 선생님은 그들이 감점된 이유가 무엇인지 다 발표해서 그것을 고치라고 말합니다. 각 방의 학생들은 지적 받은 대로 모두 고쳤습니다. 사감 선생님은 그것을 다 검사하고 다시 모두 100점을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100점에서 매일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면 모두 100점짜리가 됩니다. 완전하고 온전히 거룩합니다. 즉 성화 된 상태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난바 거룩한 자"입니다. 이 거룩함이 죄의 세상에 살아가면서 더러워집니다. 성소가 매일 매일 더러워지듯이. 그래서 정결케 하는 일이 필요하며 정결케 했을 때는 또 완전히 거룩합니다. 이 정결케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화를 계속 거룩하게 유지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행위로 성화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주신 성화를 더럽혔는데 그것을 진정으로 회개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로 깨끗이 씻어서 완전한 성화의 상태를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욕한 자라도 발은 씻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뿐만 아니라 성도는 그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완전함과 거룩함이, 세상에서 죄의 때가 묻어 더러워졌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의요 거룩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안에 있으면 그는 언제나 그 두루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빠는 일을 하는 사람이요 두루마기를 빠는 한 그는 언제나 예수님께로부터 100점 완전과 성화를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자주 같은 말을 합니다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중생 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였으면 언제나 이 생명이 우리를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즉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체질은 비록 흙이라도 거룩함, 곧 생명의 참된 모습을 생활로 드러냅니다. 결국 거룩함이란 예수 안에서 얻은 부활의 생명 그 자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의 생명으로 나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신 예수님처럼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사망이 주장하도록 하면 사망의 모습이 생활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썩는 것이며 썩는 냄새를 풍기는 모습입니다.

롬6:17~23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은 그의 잉태와 탄생과 성장과 생활을 통하여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이며 거룩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물과 성령으로 나면, 나면서부터 성화된 상태로 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생 동안 그 성화를 결코 더럽히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 보다는 훨씬 쉬운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더럽히면 속죄할 길이 없지마는 우리는 때가 묻어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언제나 전혀 더럽힌 일이 없는 것처럼 깨끗이 씻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언제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씻어 주실 약속을 믿고 죄가 나를 사로잡아 가는 일을 방치해 두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아 가려는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과 또 밖에서 공격해 오는 죄와 싸와서 이겨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상처를 입는 것을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말하게 되지요. 상처는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을 안고 예수님께 나아가 상처를 보이고 주의 손에 의하여 치료받고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싸우라고 권합니다. 죄의 유혹을 죽이라고 권합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딤후4:6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예수님은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죄와 더불어 싸우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며 싸울 수 있는 장비를 주었습니다.

엡6:11~18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여기에는 일곱 가지 무장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1. 전신 갑주 2. 진리의 허리띠
3. 의의 흉배 4. 평안의 복음의 신
5. 믿음의 방패 6. 구원의 투구
7 성령의 검
그리스도인의 선한 싸움의 무장에는 공격용 무기가 없습니다.
일곱 가지 무구(武具)를 주셨으나 공격용 무기인 활이 없습니다. 칼을 공격용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옳습니다. 그러나 칼은 멀리 있는 원수를 공격하는 데는 아무런 일도 못합니다. 가까이서 싸우는 단병 접전에는 훌륭한 공격 무기이지요. 그러나 단병 접전에는 방패도 공격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의 이 말씀에 악한 자인 사단은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火箭)을 소멸하라고 말합니다. 화전은 불화살입니다. 사단은 이 불화살로 멀리서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갑옷이 튼튼할지라도 때때로 화살이 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 예수님께 그 상처를 보이고 치료를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와 의의 흉배 등으로 이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의 싸움은 방어전입니다. 이 방어전은 공격자를 보는 대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격자인 죄와 사단을 보면 그를 닮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 승리는 이미 내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개인적으로 패배하는 경험이 있을지라도 진정으로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의 승리한 사실에 의하여 내가 승리한 자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입니다. 옛날 로마 군인은 전투에 패배하는 일이 더러 있었으나 전쟁에 패배한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전투에 패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에는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벌써 승리하셨고 그 승리가 바로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 언제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바라보자"는 말은 신약성경에 한번밖에 쓰이지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아포라오( )"인데, 눈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만을 응시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을 보기 위하여 시야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히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이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요청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매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보고 나아가면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싸움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은 벌써 2000년 전에 나를 위하여 이겨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래서 방어전입니다

. 예수께서 승리하여 주신 자리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지키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기시고 살려주시고, 승리의 성채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에 살아서 활동하는 주님의 병사들이므로 악한 자를 대적하여 싸우며 이 승리의 성채를 넉넉히 지키는 일을 할 수가 있는 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고 지킵니다. 태초에 아담은 이 승리의 자리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루스벨도 이 자리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창3:9, 유6).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넉넉히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방어전이라는 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방어란 외부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죄는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새 생명으로 새로 창조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속에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속에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그는 더 이상 사망이 아니고 생명이며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사망의 모습이 나올 수 없고 썩는 상태나 썩는 냄새가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나올 수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이 죄의 세상 사망의 골짜기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들이 가득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단과 합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란 도덕적, 정서적, 또는 종교적인 여러 허물들인데 이것들이 지체 가운데 죄의 법 곧 육신이 경험한 여러 감각들을 공격하여 그리스도인을 여러 도덕적, 정서적 허물 아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밖에서 공격하여 들어오는 죄들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 잘 방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어전이라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가 참으로 아픈 사람은 그 상처를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속히 치료해야 합니다.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상처가 악화되어 치명적이 되지요. 결과적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치료하고 통증을 없애기 위하여 우리는 길르앗의 의사이신 예수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치료하시고 자기의 승리를 또 다시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를 승리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앞에서 예를 든 기숙사 학생들처럼 또 다시 100% 완전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과 은혜에 의하여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 일생이 완전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앞에 사단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지금도 하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선언하는 "말하는 뿌린 피"(히12:24)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더러워지고 상처받은 것을 고백하고 고쳐 주기를 구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데, 이것은 발을 씻는 회개입니다. 목욕하는 회개와 발을 씻는 회개에 대하여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말씀으로 넉넉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반복하여 말합니다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온 몸이 깨끗한 것은 거듭난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이 죄의 세상에서 우리는 발 씻을 일을 매일 해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는 더러워진 발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는 일을 부끄럽고 또한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사랑의 손으로 상처를 치료하시고 발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가 온전히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더러워지고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냥 있으면 우리는 그 상처와 더러움으로 인하여 종국에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치료하지 않는 상처는 목숨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렘8:20~22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시편 38편은 상처 입은 자의 회개의 부르짖음입니다.

시38:1~22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 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이러한 통회의 부르짖음을 주께서 들으시고 속히 치료해 주십니다.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통회 자복하는 자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그들의 지은 죄 곧 사단의 불화살에 상했던 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다시 건강한 생명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건강을 회복하면 전에 아팠던 때를 굳이 기억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제 그 건강을 잘 유지하면 되지요. 그러나 사단의 공격과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은 결코 순간이라도 공격을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제나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가 성화의 상태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이 짓는다는 죄와 그 처리에 대한 성경의 계시입니다.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저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렘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이런 조건하에서 중생한 생명, 곧 새로운 창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항상 의롭고 항상 거룩합니다. 그들은 생명이 되었고 더 이상 사망이 아니며 더 이상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자가 아니라, 재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칭의요 성화요 영생입니다.
이 기별은 창세기에 있는 기별이며 동시에 계시록에 있는 세 천사의 기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