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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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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진 0 2,969 2002-02-16 14:32


이제부터 함께 나눌 내용에는 앞에서 말한 내용들이 중복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앞에서 한 말을 또 한다고 지루해 하지 마시고 자세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중복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창조와 의

말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후부터 개신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열심히 주장합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로마서에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약 성경 하박국 2:4의 말씀을 로마서에 인용한 말입니다. 즉 구약 성경에서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확실히 말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고행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루터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리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평안도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의인은 고행이나 율법을 스스로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평안과 기쁨이 샘솟았다고 합니다. 이 힘이 마침내 개혁의 횃불로 높이 쳐 들렸고 개혁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알기 위하여 로마서를 부지런히 연구합니다. 또 갈라디아서를 연구합니다. 이 두 성경은 탁월한 논리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창세기의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계시되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과연 성경은 창세기부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생각할 때에 의에 대한 개념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를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하게 되고 또 우리의 죄는 도덕성 문제에서 찾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인 잘못에 대하여 용서받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 마음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면 죄, 용서, 의 등의 말씀이 인간의 어떤 상태보다 먼저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물이든지 결과에서 원인을 추리하면 어렵습니다. 더 쉬운 길은 원인에서 결과를 보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불행은 결과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있기는 있는데 내가 있는 그 원인과 근거를 나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원인을 자기 밖(外)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결과에서 원인을 추리하여 찾는 일에 아주 익숙하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얻은 결론은 엄청난 엉터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화론이 아닙니까? 결코 증명되지 못한 이야기를 다만 추리로 맞추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금수(禽獸)와 버러지의 후손으로 만들었습니다(롬1:23).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시49:20)는 말씀은 진화론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것의 원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해 준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원인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자식은 부모의 설명에 의하여 자기의 원인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설명에 의하여 원인과 결과를 아울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서도 결과를 가지고 설명하는 로마서를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말하는 창세기에서 시작하면 더욱 분명한 개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15:6,7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 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바울의 설명을 분석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자존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1). 자존하신 하나님을 믿음=여호와를 믿으니.
2).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
3). 구속주 하나님을 믿음=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
창세기의 기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엘로힘)을 믿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기념이 있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이 네 가지 사실을 다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 네 가지 기념은 전적으로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사상이나 행위가 끼여들 자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 행위 주의를 요구하고 조장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율법과 도덕은 사람의 행위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구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 행위 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이것을 행하게 하여 사람의 행위의 의로움을 증거 하려 하는데, 이것은 죽어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지극히 도덕적이며, 율법적입니다. 이런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망과 죄의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도덕주의 율법주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롬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의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율법 준수적이고 도덕스러움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덕적 선행일까요? 종교적 계율에 충실한 것일까요?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에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로 타락했다는 심한 말을 했지요? 의와 선을 도덕적인 것이나 종교적 계율로만 생각하면 기독교는 복음에서 도덕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라 이름하신 분은 성경에, 의와 선의 본질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율법을 준수하거나, 도덕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의는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는 사람의 행위와 상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롬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면 사람의 행위가 요구되지 믿음이 요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요 그것을 전적으로 믿을 때에 하나님의 행위가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 할 때에 비록 죄인이지만 인격적 의식이 있는 자로 선재하고 있음을 하나님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일을 하나님의 행위로 행위 하시고 사망 집행 유예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 행위를 믿도록 간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행위가 그에게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창조와 구속입니다. 창조에는 사람의 행위가 들어갈 틈이 결코 없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피조물도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끼여들 틈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의 단독 행위입니다.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그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셨습니다. 창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며, 그것은 그의 영광과 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 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당신 자신을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계신 그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이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출33:18,19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출34:5,6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 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하나님의 영광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형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창조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될 수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창조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전부입니다.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영광과 의를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전적으로 영광과 의이며, 그래서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의로 창조함을 받은 의의 나무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적 순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의의 나무는 그 내용에 있어서 이미 의의 나무가 아닙니다.

마7:16~18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 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되기 위하여서는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엉겅퀴가 스스로 무화과나무가 될 수 없고, 가시나무가 스스로 포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창조 행위에 의하여서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 곧 중생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 행위인 것입니다.

시51:1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의 욧점은, 성경이 말하는 기본적인 의는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된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창조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여호와를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땅에 편만한 믿음의 후사, 곧 새 창조로 의롭게 된 백성을, 믿음으로 보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창조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 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은 로마 4:17의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과 같은 뜻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는 경험을 하기 전에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 들였던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사건은 창세기 15장의 일인데, 이때는 아직 아브라함이 한 명의 아들도 낳기 전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과 같다고 한 사건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러 갔다가 수양을 대신 드리고 이삭을 제단에서 산대로 도로 받은 사건인데, 이삭이 태어나서도 한참 후인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도로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부활, 곧 재창조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 곧 스스로 계신 하나님,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 그분은 온전히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의롭습니다. 그래서 그의 창조가 의롭고, 그의 재창조가 의롭습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구속받은 존재, 즉 재창조 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을 사람 스스로 손상시키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잘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된 상태를 지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 주신 사람이요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해 가는 사람에 대한 말인 것입니다.

2. 욥기와 의

욥기는 인간의 고난 문제를 깊이 있게 취급하고 있는 책입니다.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절절이 쌓여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서두에서 고난 당하게 되는 욥의 순전하고 의로움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욥에게 악이 없음을 직접 증언합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러한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욥은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욥이 고난 당하는 원인이 사단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읽습니다. 책 서두에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모였는데, 사단이 거기 참석했습니다. 사단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모여 섰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천사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욥기38:7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새벽별들과 함께 이 말이 나타납니다. 별이 천사를 뜻한다는 것은 다 인정합니다. 계시록 12:3,4에 하늘의 별 ⅓을 떨어뜨리는 용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용은 사단이고(계12:9) 별은 사단에게 이끌려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을 주석가들은 예외 없이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천사들인 새벽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구별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 중 누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한 일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히1:5,6). 그러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또 왜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까? 그것은 우주의 장자들의 회의에 참석한 것일 것입니다. 하늘에는 우주의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히12:22,2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온전케 된 의인"이라고 구별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사도 아닙니다. "천만 천사"가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굽니까? 이것의 대답을 위하여 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를 알고 사단이 거기 참석한 이유를 알기 위하여서는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지구에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주를 모르는 편협한 지구 사람들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오만(傲慢)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이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 그것은 밀짚모자 두 개를 마주 엎어놓은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 지름이 10만 광년이며, 한 가운데 두께가 1만 5천 광년이라고 합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달리는 빛이 10만년이나 달려가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은하계 안에 태양과 같은 항성(恒星)이 일천억개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하계가 우주 안에 일천억개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960년대에 출판한 책에 기록된 숫자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훨씬 많은 숫자가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오늘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그런데 이 티끌 같은 지구에만 사람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좁은 소견입니까.

사40:15, 17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열방, 곧 이 지구는 온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티끌 같이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없는 것 같고 빈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넓고 넓은 우주에 하나님은 많은 세계를 사람이 살도록 지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도록 지은 세상마다 첫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들이 장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입니다. 그 총회에는 모든 세계의 장자들이 다 하나님 앞에 모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바로 그 모임에 사단이 참석한 것입니다. 사단은 결코 장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자 총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물은 것입니다.

욥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지구)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즉 사단이 땅, 곧 지구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지구의 대표, 즉 지구의 장자로 왔다는 대답입니다. 자기는 지구의 통치자라는 말입니다. 모든 지음을 받은 세계의 첫 사람들은 그 세계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담이 지구의 통치자로 임명된 것과 같이 말입니다(창1:28). 만일 사단이 지구의 정당한 통치자이면 지구의 모든 거민이 순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표가 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지구의 주권 문제가 거론이 된 것입니다. 이 일에 욥이 증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1:9~11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지니라"

결국 사단은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욥에게 하나님이 간섭하고 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보호하시며 축복하시는 손을 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은 틀림없이 사단 자기를 경배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몸에 손을 대지 말고 그를 마음대로 해 보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욥에게 고통을 가함으로 지구의 정당한 주인이 사단 자신임을 하나님 앞에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래서 욥의 긴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욥기의 사건은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경배의 문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아니면 사단을 경배하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연구가들이 빗나가서 욥기의 중심 사상이 인간의 고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로 해답이 된 것일 뿐입니다. 경배에 관한 문제가 중심 문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경배에 관한 문제는 또한 창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 경배를 받아야 하는가?
경배 받을 무슨 일이 있는가?
사단은 자신이 지구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눅4: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님을 시험하는 광야에서 마귀는 이 세상을 자기가 넘겨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누가 넘겨줬습니까? 아담이 사단에게 유혹되어 지구의 통치권을 사단에게 넘겨줬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주의 장자 총회에 지구의 장자 아담을 대신하여 장자의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지구의 통치권은 자기에게 있는데, 왜 하나님이 욥을 간섭하느냐고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사단 자기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경배 받을 이유를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에 근거를 둡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사단도 원래는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였기 대문에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두려고 획책(劃策)하다가 사단이 되고 하늘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4 장에서 이 내용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단은 욥에게 고통을 가하므로 자기를 경배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짓은 세상의 폭군들이 즐겨 쓰는 방법인데, 사단에게 그 기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굳게 선택한 욥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위로차 찾아 온 친구들까지도, 욥의 고난은 욥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는 것이라고 몰아세웁니다. 욥이 호소할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긴 변론이 시작되었고 변론이 진행되면서 욥은 자기의 선행과 도덕적인 의를 오만하도록 강하게 주장합니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다, 아마도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같이 취급하시는가 보다고 강변합니다. 세 친구는 그들이 욥을 충고하면 할수록 욥이 더욱 강경하여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칩니다. 결과는 친구들은 욥을 아주 고약한 죄인이라고 결론을 지었고, 욥은 친구들을 사정도 모르면서 무조건 정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공방(攻防)은 다같이 도덕적 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도덕성이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벌을 주신다는 논리가 세 친구의 논리인 셈입니다. 쉽게 하는 말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고난 당하는 이유를 도덕적 안목에서 찾는 것, 곧 자기가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을 고난 당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누군가 이것을 명백히 가르쳐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비록 엘리후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을 약간 했을지라도 욥은 수긍할 수 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내용이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뜻 읽으면 앞에 기록된 욥기의 내용과 동떨어진 내용을 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은, 핵심을 아주 벗어난 완전히 사람들의 사상 중심의 논쟁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도덕적 선행과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정죄(定罪)의 자(尺)로 사용하고 있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곧 존재와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또한 창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경배에 대한 핵심 문제가 아닙니까? 경배는 창조와 존재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창조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고, 생명이 없으며, 물론 경배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도덕적 선행이나 악행도 존재와 생명이 있고 난 후의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욥38:1~7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準繩)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이 질문의 내용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욥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아담도 존재하지 않는 때입니다. 그때는 아직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모든 것을 있게 하지 않았으면 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아무런 행위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서 무엇이 나옵니까? 욥은 자기 행위가 자기의 도덕성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도덕적 선행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친구의 논리도 같은 논리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시고 악을 행하면 그 악의 보응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 논리이지요.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도덕이 가지고 있는 논리입니다. 욥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행한 모든 선행에 대한 보답이 고난으로 다가왔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통은 가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욥의 선행이나 고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욥의 존재와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욥을 참소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욥의 생명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욥으로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한 것은 욥의 생명을 보존하시므로 그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욥기 38장에서 41장까지 당신의 창조하신 것과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욥기에서 가르치는 의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한 대로 있을 때에 그것이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이 있게 한 자리에서 떠났습니다(유6). 그것은 악이요, 죄이며,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한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는 것은 곧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사단은 마침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에 대하여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 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창조주가 당연히 하실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창조를 거절한 창조된 존재들을 창조되지 아니한 것처럼 처리하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욥40:6~14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華美)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스스로 꾸미며 스스로 입을지니라"는 말씀은 자존(自存)과 관계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즉 욥이 자존하였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욥은 결코 자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단은 지구의 장자권, 곧 통치권을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지구 거민의 경배를 자신이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단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욥을 특별히 돌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이 욥을 특별히 돌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아울러 사단이 심판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인데,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존하여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고 스스로 있는 자가 되겠다는 사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단에게도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존재와 생명을 반납하라고 하실 날이 옵니다. 그날이 큰 날의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유6, 벧후2:4). 그래서 사단은 그 존재 자체가 악입니다. 물론 아담이 사단의 말에 속아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도 그 존재 자체가 악이요 죄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의 약속으로 아담의 후손들의 사망이 집행 유예되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재창조의 생명을 얻고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 곧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롬6:4) 되어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욥의 속죄 제사는 하나님의 이 재창조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 새 생명의 약속을 철저히 스스로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배하며 의를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당하는 재난들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바르게 선택하였으나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 행위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욥에게 창조에 대하여, 보존에 대하여 또한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의 도덕적 선행이 그 자체로써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는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있게 한 자리에 머물 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세상에서 당하는 번영과 고난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고난도 가고, 사단도 가고, 사단이 주장하는 세상도 가고 오직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한 것이 창조된 의도대로 있을 때에만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있는 것, 그것이 의요 생명이요 존재입니다. 욥이 드디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

욥42:1~6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지금까지 인간이 행하는 도덕적 선행에 의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대접하는 줄로 생각한 허물을 회개합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정반대의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도록 해 주신 사실에 의하여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선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선행은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여 생명을 주셨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법입니다. 또한 구원의 법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다음에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바르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사람은 행할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이것은 엄청나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오해를 바로잡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으로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 욥에게 창조와 보존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을 때에 욥은 비로소 자기의 인식(認識)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였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의로 회복시켰습니다. 우리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욥처럼 회개하고 그 의에 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죽음과 죄

이 문제는 4장에서 상당히 다룬 문제입니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말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말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성경은 죄라는 말을 말하기 전에 죽음이라는 말을 먼저 했습니다. 죄라는 말은 창세기 4장 7절에 처음 나타납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난 것을 보면 죄는 죽음의 본성(本性; nature)임을 알게 됩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에 한꺼번에 죄라는 말이 세 번 연거퍼 나오며 죄를 다스리기를 요청합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문에 엎드렸다는 말은 가인의 의미상 무(意味上 無), 즉 죽은 것으로 여김을 받은 것이 실제적 무(實際的 無), 즉 죽어 없어질 것으로 확정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갑자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하십니까?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5장을 다시 읽어보십시요. 그러면 이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정녕 죽게 되었을지라도 죽음의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죽는 것이란 창조되기 이전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나님께 들었을 뿐, 그 실제적인 모습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아담은 흙을 만지면서 자신이 창조되기 전에 바로 이런 것이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기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들의 살인 사건으로 뼈아픈 슬픔과 함께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가인 곧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뜻은 창세기 3:15에 하나님이 약속한 "여자의 후손"을 얻었다는 뜻이었지요, 즉 구세주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와는 자기들의 죽음을 회복할 구세주가 그처럼 속히 임하기를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것이 아니라 아담과 동침하여 득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로 태어난 것이지,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이 처녀에게 탄생한 여자의 후손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 속에 태어난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간의 사건을 통하여 성경은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이며, 죄로 인하여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간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로 일어난 사건은 바로 존재(存在)와 비존재(非存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농산물로 제사 드린 것을 하나님은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은 그에게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아담은 살아 있고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아담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이미 말한 대로 여자의 후손의 약속에 의하여 유예(猶豫)된 생명인데, 이것은 속죄를 통하여 유지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인 구세주가 와서 아담의 죽음을 처리해 주는 대속(代贖)의 속죄를 믿는 믿음을 속죄제를 드림으로 나타내어야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대속의 속죄를 믿을 때에만 유예된 생명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직 살아 있고 자녀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가인과 아벨, 또 그들 외에도 많은 자녀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태어났을지라도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속죄제의 계시는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직접 체험한 것이며, 하나님의 행동으로 계시된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이것을 아버지로부터 듣고, 그 들은 것을 믿으며, 그 믿는 것을 실천해야만 하였습니다. 즉 직접 보고 배운 시대에서, 보고 배운 사람에게 듣고 배우며 믿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씀은 생명과 존재를 하나님 앞에 참으로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존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없는 자입니다. 즉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자라는 말입니다.
아벨은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을 실천하였습니다. 속죄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없어져야 할 나를 대신하여 다른 생명이 없어져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피에 있다"(레17:11)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9:22)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래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이 땅으로 돌아갔다는 것, 즉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양이 피흘려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지요(계13:8).
그런데 가인은 이 지극히 중요한 계시의 내용을 우습게 여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자질구레하게 간섭한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제사를 드리면 되었지 무슨 꼭 피를 흘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피흘림의 제사가 바로 대속의 속죄요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유일의 길인 것을 간과(看過)해 버렸던 것입니다. 자기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자기의 의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를 있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사실을 제사로 드리면 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도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게 한 대로 존재하지 않게 된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유예(猶豫)된 사망(死亡)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때에만 알게 됩니다. 가인은 아담을 통하여 주신 속죄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지성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으나, 그 지성이라는 것은 죄로 죽은 지성일 뿐입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도 이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의식이 있고 사고(思考)가 있고, 행동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비존재(非存在)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심히 어려우며, 여기에 영원한 사망의 비극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을 수가 없었을까요? 그 대답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없는 자(非存在)가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없는 자가 드리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리기 전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없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없는 자"가 무엇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요!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속죄제를 드리지 아니한 가인은 비존재(非存在)일 뿐이기 때문에 그가 드리는 것은 드리는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요술 같은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계시는 실제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고 싶어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길을 진지하게 가인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즉 가인이 죄를 다스린 후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감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창세기 4:7은 성경에서 죄라는 말이 처음 기록된 곳이라고 이미 말씁드렸지요? 그러므로 죄는 죽음이 나타나는 성질이요 모양입니다. 즉 썩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죄를 다스리라는 부탁은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라는 부탁이요, 하나님의 절원(切願=지성스럽고 절실한 소원)입니다. 산 자가 되는 길이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후에는 예수님의 대속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옛날에 속죄제를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라는 히브리말이나, "속죄제"라는 히브리말은 같은 말 "하타트"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말이기 전에 생명을 소유하라는 권고입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 도덕적 입장에서 볼 때에 무슨 악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악을 행한 것이라고 말하지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12). 성경에 기록된 사건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그의 행한 악행은 오직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뿐이며, 아벨의 의로움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린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고 증거 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사람이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갔으나,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된 구세주가 장차 오셔서, 아담 안에서 창조 이전 상태 곧 무로 돌아가 버린 모든 아담의 후손을 구원하실 것을 믿는 믿음의 제사, 곧 속죄제를 드린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 악한 행위로 간주 되야 한다면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성경의 논리는 세상의 도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게 한 상태대로 있지 아니한 것은 그 자체가 죄요 죄는 죽어 썩는 것인데, 그 죄의 썩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이 존재하게 한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존재와 생명의 관점에서 악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적 존재, 즉 하나님이 있게 하신 길을 좇아 있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너를 다스려 너의 "유예된 무(猶豫된 無)"를 "영원한 무(永遠한 無)"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타이르신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유예된 무"가 생명적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씀인데, 곧 속죄제로 말미암아 구세주 안에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대로의 존재가 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가인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벨을 죽여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 간주되는 아벨을, 그 현실적(現實的) 존재를 죽여도 그는 과연 있는 자인가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아벨을 죽임으로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골3:3)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현실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만나는 사람이 자기의 현실적(現實的) 존재를 죽일까 봐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자로 간주된 아벨도 자기가 죽이니까 죽었는데, 하나님 앞을 떠나 영원한 무로 확정된 자기가 현실적(現實的) 존재 마져 잃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래서 만나는 자가 자기를 죽일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가 살았다고 하나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히2:14)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가인은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울러 의가 무엇인지도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 죄는 도덕적으로 저지르는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기 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 곧 죽은 존재가 죄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또한 아벨의 제사가 의의 제사였다는 기록은(히11:4) 의가 생명적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성경은 죄라는 말을 하기 전에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의 제사와 관련하여 죄라는 말이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죽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죽음은 죄요 죄는 죽음입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우리들이나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망 집행 유예 선언이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여자의 후손의 약속이 없었으면 이 이름도 없었지요)와 그의 모든 후손은 실제로 무(無)입니다. 다만 여자의 후손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유예된 생명을 누리고 있는데, 이 유예 기간에 우리의 생명을 참된 생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중생이며,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대속(代贖)과 그것을 믿음으로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 준 것이 이미 말한 대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으로 옷을 입힌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여김을 받은 사람이 여자의 후손을 믿을 때에 그 믿음을 인하여 산 자로 여기십니다. 성경은 "여긴 것"과 "실제"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골2: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 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히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이상의 말씀들은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부활한 것으로 여겨지고,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늘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 여김을 받는 것은 실제와 동일함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가인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거절하므로 사망으로 있기로 선택했습니다. 그것 곧 사망으로 있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죄, 곧 사망인 가인은, 산 자에게 있는 특성인 "아벨" 곧 "숨(呼吸)"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 아벨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생명적 존재라면, 그를 죽일 때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가를 보려는 사망의 본성적 심리가 발동하여 동생을 죽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죄제를 드림으로 생명이 된 아벨은 죽지 않는가 어디 보자"라는 사망이 확정된 사람의 실험적 행위였을 것이라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유예 기간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셨으나, 그 기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충분한 기간입니다.

시39:4,5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는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시89:47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시90:8~10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신속히 날아가는 것같은 이 기간 동안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을 따라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4.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만물.

죽음은 죄의 본성(natuer)이고 도덕적 죄들은 죽음인 죄의 성품(character)입니다. 죄가 성품이 있다는 말이 이상합니까?
사망은 썩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인 죄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죄의 성품은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사람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海路)에 다니는 것들입니다(시8:5~8). 사람이 사망이 됨으로 만물이 사망 아래 놓이게 되고 세상은 죄의 세상이 되었으므로, 죄의 세상에 사망 아래 놓인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은 당연하게 된 것이지요.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은 신약성경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썩는 것은 사망과 죄의 성품이며 이것에 속한 것들의 모습이고,
썩지 않는 것은 생명과 의의 성질이며 거기에 속한 모습입니다.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을 대조한 성경 말씀을 읽어봅시다.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딤전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롬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52~54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여기 "없어질 것"으로 번역된 말이 원문은 "썩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49:8,9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 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이상의 말씀에 나타난 것을 보면,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리키고, 썩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가리키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곧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하는데, 그것은 썩는 것이며, 그것을 좇아 행하는 것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썩는 것은 결국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없어질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은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다만 썩는 것을 늦추기 위하여 방부제(防腐劑)를 치고 냄새를 방지하기 위하여 방취제(防臭劑)를 칠 뿐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습니다.
근본적인 죄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썩는 것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썩습니다.
또한 썩을 때는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덕적, 종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썩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악들은 사망이 된 사람들의 이 썩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침내 없어질 것입니다(시37:10, 103:15,16참고).
이미 원죄에 대하여 말할 때에 지적한 대로 신학자들 간에는 죄의 본성을 조상으로부터 유전 받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본성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고, 아담 안에서 사산(死産)된 것과 그런 사산(死産)된 사람들의 썩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도덕성에 기초하여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의 진정한 본질을 간과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 "썩은 것"이라는 말은 과거형입니다. 지금 썩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썩어버린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경에는 귀신의 왕을 "바알세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조롱하기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마12:24).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이 이름은 열왕기하 1:2에 나오는 이름과 동일한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바알세붑"이라고 나옵니다. 에그론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었을 때에 그 병이 나을 것인지 어떤지를 물어 보라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는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바알세붑"이란 "파리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은 "주인, 왕"이라는 뜻이고. "세붑"은 "파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바알세불"과 끝말이 다르지요? 그러나 불가타에는 열왕기하나 마태복음이 다같이 바알세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설명이 복잡하고 깁니다. 그러나 바아세붑은 "파리의 왕"이라는 말이 되고 "바알세불"은 "똥의 왕, 혹은 똥의 주"라는 뜻이 됩니다. 즉 "바알"은 "왕, 주인"이라는 뜻이고, "세불"은 "똥"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같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왜 귀신의 왕이 "똥의 왕" 또는 "파리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졌을까요?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의 신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말은 옳을 듯합니다. 아뭏던 사단 곧 귀신의 왕은 파리와 똥의 왕이 틀림없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썩는 것에는 반드시 파리가 덤빕니다. 똥은 썩은 것의 대표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단은 세상 임금입니다. 죄의 세상은 썩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임금의 이름이 파리의 왕이라는 것은 너무도 적절한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의 이런 표현들을 읽으면 모든 것이 진리를 가르치는데 적합하게 사용된 것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 것에는 파리가 왕노릇을 못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썩지 않게 되는 실상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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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 곧 거듭남, 재창조, 새로운 피조물

이상에 설명한 사실을 이해했다면,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분명히 이해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썩는 것이 불가불 썩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너무 분명합니다.

요5:24,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의하여 말하면,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되어 썩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이 되어 썩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썩는 냄새를 풍길 수 없지요. 더 이상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생명의 향기를 드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한 사건을 통하여 극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곧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내용을 가장 선명하게 그려 주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써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도록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11:39~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이틀이나 지체하신 후에 나사로의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될까요?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사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나타내는도다"(시19: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후에 살리시는 것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며, 생명의 주께서 생명을 주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망은 사단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사단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히2:14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입니다. 죄와 사망은 마귀가 저질러 놓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요일3:8). 그러므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무덤에 묻힌 것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이 사망이 되고 세상이 무덤이 된 것을 표상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것은 사망의 세상에 생명이 찾아오신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말을 듣는 죽은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현실적 사건을 통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썩고 있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사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썩어 냄새가 나는 데서 생명의 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예수의 복음이 이루는 일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썩는 자는 죽은 자이며 죽은 자는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죄가 사망이요 썩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의가 생명이요 썩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는 사망과 상관없는 생명 그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사망이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썩지 않는 씨로 나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는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벧전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

딤후1:9,1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 우리 구주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썩지 아니할 씨로 잉태되어 탄생하셨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자가 아닙니다.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계신(요일1:1) 말씀 하나님(요1:1)이 생명의 씨 곧 썩지 않을 씨가 되어 순결한 처녀의 태(胎)에 잉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의 행위요 창조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를 사람의 과학이나 인간 생리 자체로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인간의 과학으로 측량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며, 하나님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스스로 피조물의 자리를 취하셨다는 것은 사람의 지각(知覺)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을 요청합니다. 인간의 이해나 선행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하시는 자가 아닙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의 썩어질 것을 대신 지시고 우리의 사망을 당하셨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셨지만, 그러나 그의 근본은 썩어짐의 종노릇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그의 육체가 썩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시16:9~11 이러므로 내 마음도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사도행전에는 이 예언이 예수님께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2:27,28,31,32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13:34~37 또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의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예수님은 썩지 아니할 씨로 탄생하셔서 생명이 사는 상태를 확실히 보여주시고,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당하셨으나, 그는 썩음을 당하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써어짐의 종노릇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 곧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썩어져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은 아담 안에서 죽고 썩어 없어진 자들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서 존재하고 생활하는 자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어 산 존재로 있는 것을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의(義)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는 역시 죽고 없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중생을 재창조라고 표현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니까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부활의 생명을 미리 소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창조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와 부활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골1:15~18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으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된 말은 "푸로토토코스( )"인데, "만물의 으뜸"이라고 한 "으뜸"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즉 만물의 으뜸으로 존재하신 자라는 의미이지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는 만물의 으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심, 곧 부활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피조물들의 으뜸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조와 부활이 같은 창조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활의 생명 곧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말을 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의 의를 말하고 있음에 반하여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 앞에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행위가 전혀 가입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오직 이것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롬3:21~24).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아브라함에게서 구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아브라함은 창조주와 부활의 주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롬4:17).
아담과 그의 후손은 한 번 창조되었으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행위로 인하여 아담 안에서 모두 다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전히 없어진 것과 같은데, 다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자의 후손 곧 구주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사망 집행 유예의 기간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없는 것을 있게 해야 합니다. 없는 것이 있기 위하여는 창조되어야 하고, 없는 사람이 있기 위하여는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여호와로서 사람되어 오셨으며, 아담을 대신하여 아담과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아담의 후손을 자기 안에 품고 죽어 주심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완전히 처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심으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이 부활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시고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할 수 있는 존재들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이 보편적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도 보편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처한 상황이, 다만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는 성질 곧 썩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에덴에서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처한 상황과 같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살게 되어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할 기능과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것을 거절한다 해도 예수께서 살려주신 사실이 무효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예수의 생명 안에 있지 않기로 선택한 자들과 그 안에 머물기로 선택한 자들을 분별할 수밖에 없도록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분별하십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오해가 없기 위하여 다시 한 번 태초에 아담이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