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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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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진 0 3,182 2002-02-16 14:34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제 4 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는 대답인 것을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시기 전에 그에게 선악과를 먹은 사실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이때 아담은 그렇게 했다고 직고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답을 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창조해 주신 여자를 탓하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꾀임의 장본인인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뱀 곧 사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단에게는 멸망의 선포요 사람에게는 구원의 선포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선포에는 세 가지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후의 모든 성경 말씀은 이 말씀의 주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 가지 사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주의 탄생 --- 여자의 후손(갈4:4)
2. 구주의 고난 ---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할 것임
3. 구주의 승리 ---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임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였는 데도 그렇게 유혹한 뱀 곧 사단과 원수가 되는 것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즉 사단이 구주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주께서 사단을 멸하실 때 사람은 사단에게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주는 사망이 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혜자(施惠者)요 사람은 구주로부터 은혜를 받는 수혜자(受惠者)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거절할 자유가 아직도 사람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하면 사람은 다시는 생명으로 존재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날에 완전한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불에 타서 재가 될 것입니다. 이미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영원한 지옥 불이요, 최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사망이 된 사람을 다시 생명을 주어 존재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죽는 고통을 하나님이 당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가 생명을 잃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생명을 잃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이미 우리 시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죄의 저주의 말씀이라고 강론합니다.
창세기 3장을 자세히 읽어도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뱀이 저주를 받았고(창3:14), 땅이 저주를 받았(창3:17)으나, 사람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주 대신 오히려 구주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된 구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당하실 고통을, 여자가 산 자녀를 낳는 고통으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구주께서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산 자로 다시 창조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죽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고통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당하시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사망이 된 사람을 다시 산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하시는 고통을 사람에게 맛보게 하신 것인데--먼저 선악과를 먹어 사망이 된 여자에게 체험케 하시는 것인데--이렇게 하여 낳은 자녀, 사망이 유예된 상태로 태어난 자녀를,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산 자가 되도록 양육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모진 고통을 통하여 얻은 것은 그만큼 귀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은 참으로 영생의 생명을 얻도록 양육되어야 합니다. 이런 뜻을 깨닫고 자녀를 양육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자세는 훨씬 진지해 질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고통이라는 이해는 요한복음에 의하여 확인됩니다.

요16:20~2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셨을 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이 당하시는 고난을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의 기쁨에 비유했습니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을 자신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 고통이 해산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모든 죽은 자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이 고통의 실상을 체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해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산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여야 할는지 깊이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이 아이를 바르게 생명으로 양육하기 위하여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주관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나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녀를 거룩하게 양육하여 영생을 소유하도록 해야 하였습니다. 비록 범죄 하여 사망이 되었을지라도 여자의 후손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다시 생명을 얻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므로 부모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또한 교회를 상징하는데(엡5:22~32, 벧전5:13, 고후11:2), 교회는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하고 예수께서 교회를 주관해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 말씀이기도 합니다(엡1:22,23, 골1:18 참고).
이렇게 구원을 약속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창세기 2:16,17에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죽음의 선고라도 다시 살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죽는다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창조되기 이전 상태, 곧 창조 안된 것과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이 선고의 말씀으로 자신이 사망이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의 약속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모든 믿음에는 행위가 따릅니다. 여자의 후손의 약속 곧 구원, 다시 말하면 복원될 생명에 대하여 믿는 아담의 믿음에 따르는 행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창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배필을 지어서 이끌어 왔을 때에 그에게 여자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자기가 사망의 된 것을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허락하시고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셨을 때, 여자를 통하여 생명이 회복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여자라는 이름을 지었던 아내에게 다시 하와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다음 사실을 뚜렷하게 대조해 놓은 것입니다.
아담(남자)의 후손=사망 여자의 후손=생명
이제 아담은 사망일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여자를 통하여 올 것이기 때문에 여자를 생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언제 지었는지 물으면 대개가 창조하여 아담에게 데리고 왔을 때 지었다고 대답합니다.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은 때가 언제이며, 누가 왜 지었는지 모르는 것은 구원의 복음의 기초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와 같이 믿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받으셨고, 그 믿음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곧 여자의 후손이, 사망이 된 아담과 그의 후손을 어떻게 생명으로 회복시킬 것인지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사실입니다. 무고한 짐승이 희생되는 것처럼 여자의 후손이 아담의 사망을 대신 당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짐승이 대신 죽으면서 그 가죽을 아담과 하와의 옷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을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이 예수님의 생명을 옷 입게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는 예수의 의의 옷, 곧 하나님의 의의 옷이지요.
이때 죽임을 당한 짐승은 양입니다.
어떻게 짐승이 죽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나님이 가죽만 따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가죽이라도 짐승이 죽으므로 얻지 않습니까? 물론 인조 가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만드신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옷을 입히시기 위하여 짐승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때 죽은 짐승은 양입니다.

계13:8 창세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녹명한바 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舊譯).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의미상으로 이미 이 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아담의 허리에 있지 아니한, 즉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닌, 아담과 상관없는 한 생명이 탄생하실 것을 계시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자의 후손 그분은 아담 곧 남자와 상관없는 생명이 여자를 통해서만 탄생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도 아담 없이는 이 세상에 탄생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아담이 없으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생명이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든지 이 분명히 계시된 예언이 가르치는 방법으로 오지 아니한 자는 결코 구세주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은 여러 번 계시하고 있습니다.

렘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이 말씀은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생명이 여자에게서 남자로 탄생한다는 예언입니다. 아무래도 생명은 남자로부터 이어지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새 생명의 창시자도 비록 여자의 후손 곧 아담과 상관없는 자신의 생명으로 처녀에게 잉태하여 탄생하시지만 그분도 남자로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상관하지 아니한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어떤 학자는, 말세에 여자가 타락하여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애욕을 갈구하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여호와가 창조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주가 오실 일을 하나님이 창조적 사업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예언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만일 예수께서 구주가 확실하다면 그분은 처녀에게 탄생하셔야 합니다. 숫처녀에게서 탄생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결코, 결단코 구주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하여 회의하면서 빈정거리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구세주라는 확실한 증거로 내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찬송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롬11:33~36)!
사람들이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느냐고 따지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은 어떤 사람도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주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유일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 라.
이 선언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결코 독선(獨善)이 아닙니다. 다만 확실한 진리인 것입니다.

1. 예수께서 탄생하신 방법.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눅1:26~35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구세주는 남자를 전혀 경험하지 아니한 숫처녀에게, 아담을 자기 안에서 택하여 창조하신(고전15:45, 엡1:4,5) 여호와라 이름하신, 생명이신 당신 자신이(요1:4), 생명의 씨가 되어 잉태되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동침한 경험이 없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성경은 분명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에 하와는 자기에게서 뱀을 이길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성급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가 아이를 잉태하고 아들을 낳았을 때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하와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에게서 난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할 구주라고 생각하고 외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얻었다"는 것입니다. 즉 구주를 얻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가인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창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가인은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잉태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담 곧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는 그 모친 마리아가 남자와 동침한 경험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마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동침이라는 말이 개역 한글판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지만 신약 성경에는 그 낱말이 오직 마태복음 1장25절에 한번만 나타나는데, 동침치 아니했다는 사실을 계시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동침이라는 말[이 말은 창세기 4장1절에는 히브리어 "야다( )"가 쓰였고, 마태 1장25절에는 헬라어 "기노스코( )"를 썼습니다. 이 말들을 직역하면 "안다"는 말입니다. 즉 서로를 체험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동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여러개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침상에 눕는다"는 뜻을 가진 "샤카브( )"입니다.]을 성경에 이렇게 사용한 것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동침치 않고 탄생하실 사실을 강조하려는 계시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에 대하여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했다고 밝혀 기록하였으며, 결국 가인은 구주가 아니라 여전히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망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와 동침한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남자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의 차이, 곧 죽은 것과 산 것이 다른 만큼 다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다 죽었고, 예수님은 홀로 산 자 곧 생명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 자신이 친히 밝히셨습니다.

요8:23,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우리는 오해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꼭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와 엄청나게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난 것과 아래서 난 것이 다른 것처럼 다르며, 이 세상에 속한 것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는 것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와 그렇게 다른데?
"예수님이 우리 아담의 후손인 사람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살수가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며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구원을 전적으로 오해 한데서 나온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모본이 되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모본이 되시는 것이지 아담의 후손으로만 있는 죄인에게 모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본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중생한 사람의 모본입니다.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구원은 아담의 후손으로만 있는 사람을 그 가운데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상태로 세상에 오신 것이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상태로 오셔서, 자기가 열심히 선을 행하므로 구원받은 상태에 오르고, 그렇게 된 후에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 즉 구원받은 상태, 곧 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의 죄를 대신 지실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것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된 사람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산 것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모본인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다시 한 번 하게 될 것입니다.

2. 여자-마리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닌가?


이와 같은 이치를 듣는 사람들은 석연찮은 의문을 떠올립니다. 곧 "그렇다면, 예수님을 낳은 여자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닌가? 여자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면, 여자를 통하여 태어나는 예수도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의문이요, 이 이치를 공부하면 떠올려야 하는 의문입니다.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으면 앞에 설명한 내용을 아직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거나.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문제 앞에 있을 때에 항상 그 일의 시작부터 생각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것은 창조하기 이전 상태 곧 흙으로 돌아가는 상태라는 것을 상기(想起)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아담의 모든 후손은 이미 흙일뿐입니다.
현명한 독자는 이 말의 뜻을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는 남자나 여자나 다만 흙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자에게 생명의 씨를 잉태케 하시는 것은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사람을 만드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그 안에 생명의 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에게서 생명의 씨를 받아서 기르는 역할이 여자의 역할입니다. 남자가 생명의 씨를 여자에게 주고 여자가 그 씨를 키워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자의 정자(精子)가 생기(生氣)의 역할을 한다면 여자의 태(胎)는 흙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명의 씨를 여자에게 주어야 할 남자는 이미 생명의 씨가 아니라 사망의 씨 곧 썩어짐의 씨를 여자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서 생명이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가 생명의 씨가 되어 흙인 여자에게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여자가 비록 아담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그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의 영향 아래 있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이 토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토(薄土)에서 자라는 식물은 비록 같은 씨앗일지라도 옥토에서 자라는 것보다 질이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생명일지라도 그 몸은 죄인들의 몸과 같은 체질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죽어서 난 아이(死産兒)와 살아서 난 아이(活産兒)의 차이라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가 흙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욥10:9~12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여기서 "생명"이 정자(精子)에 대한 언급이라면, 흙은 난자(卵子)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33: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욥4: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시139: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모태를 땅의 깊은 곳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체질은 아담의 후손들의 체질과 같으나, 그의 생명은 아담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려주는 영이 되신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아담 후손의 체질을 취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 후손인 우리와 생명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며, 체질에 있어서는 같은 것입니다. 체질을 주장(主掌)하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생명이 주장(主掌)하는 체질은 생명으로 생활하고, 사망이 주장(主掌)하는 체질은 사망으로 생활하는데 그것은 곧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 마리아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담의 죄에 감염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체질이 같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육체와 아담 후손들의 육체의 차이는, 예수님의 체질은 살아서 태어난 아이의 육체라고 한다면, 아담의 후손들의 육체는 죽어서 태어난 아이의 육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 곧 체질은 같으나, 하나는 생명이 있으므로 썩지 않을 뿐 아니라 생활을 하고, 하나는 썩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산아(死産兒)의 육체와 활산아(活産兒)의 육체 사이에 육체 그 자체에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산 사람은 같은 육체라도 썩지 않고 죽은 사람은 같은 육체인데도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아닙니까? 그것은 곧 사망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망이 주장하는 육체는 썩습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버린 아담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죽은 행실 곧 썩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히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엡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3. 마지막 아담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한 사람의 아담, 곧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아담을 산 영이 되게 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태초에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어 산 영이 된 것같이 지금도 아담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살려주시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빛이요 생명이십니다(요1:4).
성경에서 아담이라는 말은 인류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태초의 아담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시조였던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 된 누구든지 새로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을 산 영이 되게 하신 살려주는 영이신 그분이 당신 자신의 살려주는 생명의 그 능력으로 흙인 여자의 태를 빌려 새로운 피조물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엡4: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뒤에 중생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다시 말하겠지만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창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 창조하신 것을 창세기 1:2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예수를 믿으므로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것이 확실한 진리라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또 새로운 죄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시겠습니까? 죄 없는 새 피조물을 창조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에 죄성(罪性)이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다만 아담의 후손인 우리와 같은 체질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것은 창조 당시에 아담의 체질보다는 훨씬 약하여진 토박한 흙으로 지어진 체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약해진 체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아담이 가졌던 체질보다 부서지기가 훨씬 쉬운 체질이지요. 그러나 그 체질이 죄의 체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을 잃어버린 것,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비생명(非生命)이 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한 번도 비생명이신 적이 없습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비생명이 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사단은 아담이 그렇게 좋은 체질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단번에 비생명으로 떨어지게 했기 때문에, 약한 체질로 오신 예수님을 아주 쉽게 비생명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약해진 체질을 가지고도 결코 비생명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단연코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이 없습니다. 즉 원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스스로 직접 지은 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넉넉히 아담의 죄, 곧 아담의 죽음을 대신 담당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살아가신 모습은 새로운 피조물이 사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즉 중생한 사람이 사는 생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구원 얻은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이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채로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 자손인 우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손인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므로 예수님과 같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생한 사람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의 모본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요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삶의 본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