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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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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진 0 3,474 2002-02-16 14:36


1. 원죄(原罪)
성경은 죄의 보편성에 대하여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내가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20:9).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세상에, 인류에게 죄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 양심이 이미 그것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도덕성과 관련된 양심의 소리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죄를 도덕적인 성품의 상태라고 단정짓게 합니다. 그러나 정말 죄는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이며 왜 생겨났는가?
세상에 왜 이런 죄와 악이 편만 한가?
이 의문은 우주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면 죄에 대한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오늘날 모든 종교가 도덕적 종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종교들이 다루는 죄와 의, 악과 선이 모두 도덕적 개념들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도 도덕적 종교로 타락한 마당에서 선과 악, 의와 죄에 대한 개념이 도덕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둑질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또 사기(詐欺)나, 살인, 간음, 불효 등을 죄라고 하지요. 물론 이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이면 대부분 인정하는 도덕적 죄들입니다.
유치하게 말해서, 성경이 죄라고 할 때만 죄가 아니라, 도덕적인 죄들은 누가 말해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들은 도덕적인 행위로 속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피 공로를 믿지 않으면 이런 죄도 결코 사유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너무 기독교인다운 주장일는지 모릅니다. 가장 쉬운 예로, 도둑질하던 사람이 자기의 도둑질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일이 찾아서 배상하고, 그 배상한 사람들에게 용서받고, 또 필요하다면 법적 형벌도 달게 받은 후,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고 오히려 구제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의 도둑질하던 죄가 용서된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그는 더 이상 도둑이 아닙니다. 그는 구제하는 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도덕적인 죄들 중에도 살인이나, 간음이나 이런 종류는 보상할 길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은 후에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그런 행위를 반복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전에 저지른 죄를 누가 기억하겠으며, 그런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그럴지라도 그의 양심의 흔적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겠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까요?
성경은 도덕이나 일반 종교가 가지고 있지 않는 죄에 대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죄(原罪)라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상인데, 그 죄는 조상 곧 아담 안에서 타락한 도덕적 본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도덕적 본성"이라는 말은 참 묘한 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원죄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도 꽤나 다양합니다. 교의학이나, 조직신학, 신학 사전들을 찾아보면서 그 설명이 어지럽도록 복잡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원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신학 사상이 있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원죄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사람은 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타락한 성질을 유전으로 받은 상태로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만 몇 가지를 인용해 볼까요?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회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원죄에 대한 교리를 트렌트 공의회에서 인정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최초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 본래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육신과 영혼은 감염되었고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둘째, 그러한 최초의 타락에 의한 원죄는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식(生殖)에 의해서 전달된다.
셋째, 죄가 갖고 있는 본래의 모든 본성과 원죄로 인한 모든 죄된 상태는 세례를 통해 제거된다.
넷째, 현세욕(現世慾)은 세례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데, 그러나 이때의 현세욕은 비록 바울은「죄」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단지 환유적(換喩的) 의미에서 죄일 뿐이다(기독교 대백과사전, 12권 353p. 서울, 기독교문사 간, 1984년).
환유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입니다. 換은 "고칠 환"자입니다. 喩는 "깨달을 유"자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아서 고치도록하는 의미의 죄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이 어거스틴 설의 주된 윤곽은 터툴리안의 문헌만큼이나 일찍 발견되었는데, 루터, 칼빈, 그리고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 가르침은 아담 안에서 인류는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이 통일성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직접적으로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자유 행위 속에서 인류의 의지는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며 인류의 성품은 그 자체가 부패하여졌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성품은 아담 안에서 부패되어진 동일한 바로 그 성품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우리에게 어떤 생소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당연히 우리의 죄로서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는 것입니다(헨리 디이슨 저, 권혁봉 역, 조직신학 강론, 421p. 서울, 생명의 말씀사 간, 1975년).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 이 어거스틴의 견해가 대부분의 개혁자들이 받아들인 원죄에 대한 견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성품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는 것을 원죄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터가 생각한 원죄에 대하여, J. L. Neve는 그의 저서 기독교 사상사 1권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는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 하였다. 왜냐하면 부계(父系)의 정자(精子)가 대대로 부패를 자손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루터는 '육'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한 중세기의 개념을 떠나서 '육'을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종교적 형벌로 본 바울의 개념을 따랐다. 영혼은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간에 항상 활동하는 것이며, 그러한 활동의 배후에는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부단한 욕망, 죄된 의지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기만을 추구하고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행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는 그것이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하고 유덕한 일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추구한다. 즉 인간은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고집은 우리 속에 있는 가장 길고 큰 악이며,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의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고집 혹은 정욕은 우리의 영적 생활 전체에 침투되어 있는 원죄이다. 왜냐하면 자기 추구의 의지는 우리의 모든 선한 결심, 특별히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결단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흔히 그것을 자각하지도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축복 때문에, 혹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불순한 정욕의 사랑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즉 다시 말하면 원죄는 이기적인 사랑으로서 우리의 모든 순결한 사랑 가운데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 행위의 배후에 서 있는 무의식적인 의지는 자기 고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타락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J. L. Neve저 서남동 역, 기독교 교리사, 354, 355p. 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간, 1974년). 이 모든 견해들은 원죄를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성품을 아담에게서 유전 받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원죄다'라는 설명입니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생겨난 인간의 본성은 너무도 철저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선행을 하려는 의지조차 가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은총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예정설은 주로 그러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기독교 대백과사전, 12권 352P.).
이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 때문에 기독교 교리사에 유명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래서 인간은 의와 선을 행할 수 없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도 선과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은 이미 말한 대로 도덕적 관점에서 말하는 주장입니다. 창조와 재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이 논쟁은 의미가 없는 것같습니다. 도덕적 관점에서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즘도 우리 교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 죄의 문제를 도덕성 일변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us:354~430)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으로써 기독교 교리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펠라기우스(Pelagius:360?~420?)는 영국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도덕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으로써 어거스틴과의 논쟁에서 나타난 대로 원죄설을 부인하고 자유 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도덕적 죄론에 치우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론의 맥락을 볼 수 있는 것은 죄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확실히 깨닫지 못한 결과가 성경의 종교의 참된 기별을 얼마나 왜곡시키는가를 실감하게 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대조하면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어거스틴의 주장
펠라기우스의 주장

1.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인간은 죄인이며, 선행할 수 있는 경향이 있다. 자유 의지를 주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복종함을 따라 죄를 범치 않을 능력이 있으나 인간의 본성은 부도덕하다.
인간은 죄가 없다. 절대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의 본성은 도덕적이다.

2. 인간의 타락

정신적 육체적 죽음은 아담이 준 것이며 전 인류는 그의 유전에 의하여 타락했다.
정신적인 죽음은 아담이 준 것이로되 전 인류에게는 그것이 단일 예인 것에 불과하다.

3. 타락 후의 인류

각 사람은 부정, 죄의 성질, 유전을 가지고 나왔고 진정한 고결함은 불가능하다.
각 사람은 아담 타락 전과 같이 죄가 없다. 자유인으로 났으니 아담의 예를 배워서 자기의 죄로 타락한 것뿐이다.

4. 의 지

타락 전 자유 의지는 타락과 함께 정의 고결을 선택하는 자유 의지를 상실하고 죄의 종이 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늘 자유이다. 선악간 어느 것이나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5. 죄

죄는 유전이어서 나면서부터 본성 중에 죄가 있게 되었고 죄의 행위로 끝마친다.
인간 개인의 성질에 유전한 고유한 죄는 없다. 전 인류는 필연적으로 죄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6. 은 혜

은혜는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하여 인간의 정신 생활이 시작되고 계속되어 완성된다. 이 은혜 없이는 인간에게 후회도 신뢰도 없다. 속죄의 은혜는 피하기 어려운 예정의 움직임이다.
은혜는 의지, 지혜, 의 등에 의하여 각 개인에게 자연스럽게 부여된다.

7.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예정은 개인적이어서 영원하며 또한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발은 있을 수 없다.

(송낙원 저, 교회사, 서울, 이건사 발행, 1981년, 166,167 쪽)



현대주의적 기독교나 심리학자들은 "원죄가 인류의 보편적 자범죄적 성향과 혼동되어져 왔으며 죄의 보편성에 대한 가정적 원인이 죄의 의지가 발현된 현상으로 오인되어져 왔기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원죄는 사실(fact) 이 아니라 추론이며 사실에 대한 가정적 설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원죄는 관찰된 사실의 본성으로는 인식되지 않으며 종종 억압적인 교리로 여겨지고 있다.... 원죄의 교리는 바울이 제시한 우연한 유추를 제외하고는 성서에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그리고 아담과 최초의 타락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그가 유대 사상에서 끌어낸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기독교 대백과사전 12권 355p). "심리학과 생물학은 인간 본성이 죄의 행위에 의해 교란될 수 있다는 관념 혹은 그런한 교란이 육체적 유전에 의해 널리 퍼질 수 있다고 하는 관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 쉴라이에르마허의 시대부터 죄의 보편성과 전파를 개인이 도덕적 의식을 갖게 된 뒤 사회적 환경이 미친 영향력의 견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기독교 대백과사전 12권 356p). 이런 견해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죄 사상을 부인하는 견해들입니다. 그러면서 보편화되어 있는 죄의 문제를 환경적 영향력에서 찾으려는 비성경적 시도들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의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면 왜 그렇게 악하게 되었을까요? 만일 태어나면서부터 악하지 않다면 자라나면서 왜 악한 경향에 쉽게 물들까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좋지 못한 성품을 가지고 나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말을 찾아야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그런 이유를 설명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류가 원천적으로 죄인이 아니라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는 예수님의 대속의 사업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를 합당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원죄라는 공리(公理)가 필요했습니다. 성경에는 원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5:12에 설명한 말을 근거로하여 원죄라는 말을 창출해 낸 것 같습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한 대로 도덕적 성품의 타락일까요? 물론 그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시작하면서 말한 것처럼, 성경은 도덕성을 문제 삼기 이전의 문제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와 생명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도덕성이 죄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선악과를 먹은 직후의 아담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는 모든 도덕적 상태가 형편없는 인격이 되어 버렸을까요? 파렴치한이 되고,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치는 그런 사람으로 당장 전락했을까요? 모르긴 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의 아담의 도덕성은, 그 이후 이 세상에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의 모든 도덕성을 합한 것보다 더 훌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께 부도덕하게 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후에 이어지는 생활에서 부도덕이 자연스럽게 행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그런 부도덕을 행하게 된 것이 원죄라고 말하겠지요. 이런 설명이 일리 있는 설명이지만 정곡(正鵠)을 찌르는 설명은 아닙니다.
성경은 죄라는 말을 한마디도 사용하기 전에 죽는다는 말을 먼저 사용한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에게 주신 자유를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사람이 자유가 있다 해도,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기억하시지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와 존재 방법을 결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나를 창조해 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없고, "나를 낳아 주세요"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에게 자기가 태어나고 싶다고 요청하여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었고, 존재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나의 존재와 생명을 선택하는 일은 나에게 허락되어진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끊는 것은 부모가 나를 선택한 그것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바로 이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 죽은 상태 그것이 원죄입니다. 4장 끝에 쓴말을 다시 옮겨서 읽어봅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즉 창조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그의 모든 후손을 자기 허리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여자 외에는 아직 한 생명도 낳기 전에 그는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그의 모든 후손도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 안에서 함께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된 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갓난아기라도 죄인인 것입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를 단수(單數)와 복수(複數)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즉 죄와 죄들로 표현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이것을 구별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만, 신약 성경에서 이것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죄는 바로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죄들은 이 죽은 결과로 생기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신약 성경 로마서부터 계시록까지 죄라는 명사(名詞) 하마르티아( )를 세어 보면 단수로 쓴 것이 대략 72번이고, 복수로 쓴 것이 대략 43번입니다. 마태복음부터 사도행전까지는 단수가 15번 정도이고 33번이 복수입니다. 하마르티아 외에도 죄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구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가리킬 때도 복수를 사용한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와 같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이치를 따라 생각하면 현재 이 세상에는, 아담의 후손으로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사망의 골짜기, 흑암의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함이라.

세상은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엄청난 묘지인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현세의 유기적인 존재들을 죽은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세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또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죽음이 집행되기까지의 기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사망이 되었을 때에, 이 지구에 행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파괴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킨 사단의 행위인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우상이 차지하도록 두실 수 없으시며, 다른 존재에게 넘겨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요 그분만이 존재이시며 그분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요 그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사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사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지키셔야만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창조를 온전히 보전하는 것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셔서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속죄하셔서 하나님의 창조를 복원(復元)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약속에 의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그 당연히 당해야 할 사망이 유예(猶豫)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집행이 유예(執行猶豫)된 상태일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에 죄라는 말보다 죽음이라는 말이 먼저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죄라는 말은 창세기 4:7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죄는 죽음이 선고된 사람이 여자의 후손의 약속 때문에 죽음이 집행되지 않고 유예되어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하타트( )"와 헬라어 "하말티아( )"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과녁(목표)인데, 선악과를 먹는 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가 버렸기 때문에, 살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목표가 빗나가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죄라고 이름지은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날의 심판 때까지 유예된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유예된 상태란 여자의 후손에게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죽음을 대신 당하게 할 것을 전제(前提)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죽도록 버려두지 않고 살아 있도록 일정한 기간 곧 수명(壽命)을 허락하셨으나 실질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본질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유예된 기간에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회복되는 생명을 거절하면 실제로 무(無)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죽은 자로 여김을 받고 있는데 이 상태를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영생한 것으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김을 받는다"는 말의 중요성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성경은 세상의 사람들을 죽은 자로 여기는 말씀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마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딤전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계3:1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생명과 존재를 확정하지 아니한 유예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날에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시103:15,16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37: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37:20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이 날이 이르기 전에 사망 집행이 유예된 생명을 가진 우리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다시 주신 생명을 얻어서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확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2. 도덕적인 죄들

위에서,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죄와 죄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그러면 죄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았다가 죽은 것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죽은 것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썩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사망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두 죽어서 썩고 있다는 말입니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죽은 자에게 나타나는 이런 썩는 현상이 도덕적 죄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도덕적 부패(腐敗)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부패라는 말은 썩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오늘날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도덕의 파괴는 그 썩어짐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표일 뿐입니다. 종교들과 도덕가들과 교육가들은 이 썩는 것을 막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이런 노력들은 다만 방부제(防腐劑)와 방취제(防臭制)를 사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부패로 치닫고 있습니다. 워낙 죽은 것들만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처리는 그것을 완전히 불태워 없애든지 아니면 다 살려서 싱싱한 생명을 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썩는 것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마침내 없어지고 맙니다. 썩는 것을 물리학적인 말로 표현하면 산화(酸化)이지요. 산화한다는 것은 타(燃燒)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복의 길에서만 산화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즉 썩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을 주는 것, 곧 죽은 것을 살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또 거절하면 그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다가 그 산화가 끝나는 날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옥 불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산화의 절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혀 창조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생명의 길을 확실히 해주심으로 누구든지 이 길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대로 존재할 수 있는 복원(復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이와 같이 존재와 생명, 곧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를 믿을 때에 영생에 이르는 길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했을 때 자연히 썩는 일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런 생명의 원리 때문이지 도덕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최고의 도덕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당연히 따르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의 도리를 깨닫고 성경의 진리를 믿는 사람은 고도로 거룩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진정한 뜻을 깨달으면 구원 곧 중생과 아울러 기독교는 빼어난 도덕적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이 무슨 뜻인지 연구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