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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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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진 0 4,580 2002-02-16 14:39


오늘날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이면서도 도덕적이지 못한 모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선교 보고를 하시면서, 모슬렘들은 기독교를 가장 부도덕한 종교로 여긴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말하는 모슬렘이 기독교를 부도덕한 종교로 치부하는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술을 마신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는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간음을 한다.

이것은 물론 그들의 표준에 의한 것이지만, 이런 표준에 의해서 생각해도 기독교인들은 절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도덕성을 너무 많이 상실한 것같이 느껴질 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말을 대신하여 드린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국의 도덕적 실상은 모슬렘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평가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슬람교 국들은 기독교 국들보다 훨씬 도덕적인 것 같은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지나친 비하 심리일까요?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이것을 회복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은 대학 교수인 박사님과 그의 부친 사이에 있는 종교적 갈등, 즉 불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부친을 죽이게 한 이유 중에 하나인 것처럼 보도한 내용이었습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 내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에 종교적 갈등이 개입되어 있다니 정말 기절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설하고 모슬렘들이 말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계적 종교들은 다 도덕적인 종교입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인도교, 그리고 비록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라도, 어떤 나라의 큰 종교들은 다 그러할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 마땅하지요. 그래서 기독교도 이런 도덕적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수치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의 고급 종교로 여겨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분명 기독교의 타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론이라는 것이 계시 종교임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절대자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탐구의 결과로 경전이 형성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 경전의 권위를 말하는 논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도 코란을 마호멧이 받은 계시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경이나, 힌두교의 경전들의 출처에 대하여는 아는바가 없으므로 감히 용훼(容喙)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에 의하여 주어진 그것을 믿는 계시 종교라는 것만으로 기독교의 차별성을 주장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주가 있다는 것도 역시 다른 종교와의 차별을 드러내는 내용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주라는 사실이 증거 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의 책인 성경에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분명히 찾아야 하며, 계시는 또한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기독교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현대의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이면서 도덕적이지 못한 이유가 성경이 계시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데 연유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현대주의 신학은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하나의 설화(說話)로 간주(看做)합니다. 즉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종교를 설정(設定)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하나의 신화 내지는 전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참으로 창조주(創造主)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자존자(自存者)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을 창조자요 자존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종교를 설정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가설일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주의 기독교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내세(來世)는 현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고, 기록된 내용들은 신화적(神話的)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비신화화(非神話化)하여야 그 본래의 의미를 찾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도 신화적 표현일 뿐이며 그것이 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표현을 빌어서 다른 교훈을 주려는데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사신론(死神論)을 거쳐서 해방신학(解放神學)으로 발전하면서 하나님이 죽었으니, 인간이 스스로 성숙하여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인간을 격상(?)시키고, 교회는 인간을 사회와 국가의 제도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당연한 결과로 종교 다원화(多元化)를 제창하는 신학이 대두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종교 다원화를 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동질(同質)의 구원이 있다는 외침이지요. 결국 이런 주장은 기독교나 여타의 종교가 동질이라는 것을 기독교 자체에서 외치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현대와 같은 복잡한 세계에서 공생할 수 있다는 발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고 그런 사상을 발전(發展) 전개(展開)시키다 보니 인간적 발상이 하나님의 계시를 대신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와 생명의 종교가 한낱 도덕적 종교로 격하되면서 오히려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복음도 잃어버린 기형아가 되어 버린 것이 현대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이 될 지경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열심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강조하고 외치는 종교가 되어서 여타 도덕적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권선징악이 바탕이 된 교리와 신조를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권선징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은혜 때문에 별로 힘이 없습니다. 그런 결과로 기독교가 도덕적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못해도 십자가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그 잘못은 용서되고, 징악(懲惡)이 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권선의 역할도 못하고 맙니다. 이런 모습을 예수의 사랑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라고 도장(塗裝)을 합니다. 그래서 죄와 악이 근절되기는커녕 조장되고 기독교는 타락(墮落)의 나락(奈落)으로 곤두박질하여 오늘날과 같은 무도덕 무윤리의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를 단단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시는 독자들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모든 도덕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전제(前提)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도덕적 권선징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없는데 어떻게 선을 권하고 악을 징치(懲治)합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있다"는 전제는 당연하지요. 이러한 전제 위에 종교가 놓여 있기 때문에 권선징악의 교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의와 선을 행하는 사람은 행복한 중에 영원히 있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고통 중에 영원히 있다"는 교리와 신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권장하기 위하여 극락과 천당이 있어야 하고 악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지옥의 영원하고 무섭고 혹독한 형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하여는 상을 준다는 것보다 형벌을 가한다는 쪽이 더 빠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또한 선을 권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일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3대 종교가 똑 같이 지옥 천당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똑 같이 선을 행하는 사람은 천당이나 극락에 가서 행복한 중에 영원히 살고, 믿지 않고 죄를 짓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옥에 가서 영원무궁토록 고통 중에 산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똑 같이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가르침은 언제든지 "사람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는 이런 가르침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계시의 책인 성경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종교의 범주 안에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타락입니다. 또한 그것은 비진리요 커다란 오류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상태를 그렇게 계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생과 영벌을 "사람이 있다"는 전제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믿고 선을 행하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아 있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런 사상의 냄새도 풍기지 않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존재 자체와 생명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존재와 생명이라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계시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성은 하나님이 존재하게 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대로 존재하는 생명적 존재들에게 나타나는 그 생명의 생태(生態)라고 계시할 뿐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존재 보다 도덕성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구원과 영생이 마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결과인 것처럼 가르치면, 창조와 부활의 종교가 인간 행위의 종교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죽게 된 후에 성경의 계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성경의 기록 연대를 보면, 아담이 창조되고 또 죽게 된 후, 2500여년이 지나서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시작은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존재와 무"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그 시작부터 존재와 무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있는 것의 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 주변에 모든 것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부모도 있었고, 집도 있었고, 먹을 것, 입을 것 등등, 우리의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있었습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도 사정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만물을 다 만들어 두신 후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없다는 것의 한정된 개념일 뿐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없는 것은 있는 것의 반대라고 이해하면 평범하지만 옳은 이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처음부터 없는 것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류와 우주와 만물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이미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존재 자체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 외에는 그분이 있도록 하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처음부터 확실하고 엄격하게 계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있는 자"라고 계시합니다. 그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우주가 있게 되었고, 지구가 있게 되었고, 사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있게 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있게 하지 않은 것은 이 우주 안에 결코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어떤 종류의 판단도 있을 수 없지요.

창세기 1장에서 3장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있게 된 것과 있다가 없게 된 것, 또한 있다가 없게 된 것이 다시 있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시합니다. 그런데 없었는데 있게 된 것을 창조라고 하고, 있다가 없게 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을 구원 혹은 구속이라고 계시하고 있으며, 있다가 없게 된 것을 영원히 없게 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말이 꾀나 까다롭게 꼬여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창조는 없는 것을 있게 한 것이고,
구원은 있게 되었다가 없게 된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구원을 재창조라고 하고,
구원받은 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며,
심판은 이러한 재창조를 거절하는, 즉 있다가 없게 된 것들이 다 시 있게 하는 것을 거절할 때에 그 거절한 대로 영원히 없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처음 기록들이 이것을 계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의 설화로 보면, 이런 계시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로 하나님의 계시 대신 인간의 도덕과 학설이 종교의 내용을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가장 기초적이요 근본적인 성경의 계시의 의미를 간과(看過)한 것이 바로 기독교의 치명적인 맹점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생명의 종교가 도덕과 행위의 종교로 전락하였으며, 그리고도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생명적이지도 못한 상태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생명적이지 못한 것은 창조의 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도덕적이지 못한 것은, 창조와 부활의 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상태에, 십자가의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말미암는 자유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창세기 처음부터 계시하는 "없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나, 있다가 없게 된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나, 이렇게 다시 있게 된 것을 영원히 있게 하는 것"은 모두 "있는 자"라는 뜻인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 특히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생명과 존재로 사람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창조와 구속은 그 의미상으로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전제(前提)는 "있는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있게 한대로 있기를 거절하므로 있다가 없어져버린 존재"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전제(前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된 계시이며, 구원의 진상을 분명히 아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아주 중요한 계시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