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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의 기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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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복음 0 2,863 2007-04-18 19:15
세 천사의 기별이란 요한 계시록 14:6~12까지 기록된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14:6~13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 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기별이라는 말은 요즘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세 천사가 선포하는 말씀의 내용을 기별이라고 곧 잘 말합니다. 아마도 1900년대 초에 번역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로는 Three Angel's Message입니다. 요즘 번역을 하면 세 천사의 메시지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이 기별(奇別 혹은 寄別)이라는 말은 꽤 의미가 있습니다. 왕조 때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을 날마다 아침에 적어서 반포하는 일을 기별이라고 했습니다. 승정원은 승지들의 관청인데, 요즘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별은 왕이 전하는 말씀을 중요하게 취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별이라는 말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이 기별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해야 할 영원한 복음 기별로서는 마지막 내용입니다. 이 기별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천사의 이야기는 없고 계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초청하는 말씀이 결론적으로 기록된 것을 끝으로 성경의 모든 자비의 호소가 끝납니다.
 이 세 천사의 기별의 내용을 간단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사의 외치는 내용은,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외치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둘째 천사의 기별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는데, 그 성은 모든 나라를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섞인 것이 없는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면 복음, 곧 복된 소식이 있는 것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심판이 나오고, 두려워하라는 경고가 있고, 진노의 포도주가 나오고, 세세토록 고난받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영원한 복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분명히 복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제 복음이 무엇인가를 일별(一瞥)해 봅시다.
1. 영원한 복음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졌습니다. 영원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줍니다. 우리말로 복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유앙겔리온(          )"입니다. 직역하면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눅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여기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 바로 유앙겔리온입니다. 즉 복음이라는 말이지요. 구주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여자의 후손을 공부하면서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시지요.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말이며,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롬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첫째 천사가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졌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천사는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심판을 전하고 있으며, 하늘과 바다와 여러 물 샘을 지으신 이, 곧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이 내용 중에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나타났는데,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서 그들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복음이었으며 이제 나타난 복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세 전부터 복음이십니다. 다만 그 복음이 나타날 필요가 없어서 감취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기념 의미를 연구할 때 말하였습니다.
 우주 삼라 만상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천사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이 우주 안에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 없이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골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3:11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복음은 존재의 기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을 때 사람은 복음을 만난 것입니다. 흙이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태초부터 예수 안에서 존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엡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존재하는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에게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태초에 선악과를 먹는 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의 위치를 확인시키는 질문이었지요. 그래서 결국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예수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잃어버린 존재를 다시 있게 하기 위하여 나타나시고 복음의 실상을 드러내셨습니다.

딤후1:9,1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딛1:1~3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이 모든 말씀들이 복음은 영원한 때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복음이 때가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와 재창조의 기별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시요 또한 재 창조주시라는 기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던 자들이 예수 안에 있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비존재가 되었으나 이제 예수께서 다시 재창조자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비존재가 된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외침이 첫째 천사의 영원한 복음 기별인 것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도덕적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상태에서, 창조 사실에서 하나님을 찾아 진정한 존재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이 첫째 천사의 외침입니다. 창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 차원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으로 임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공부한 내용을 상기(想起)하시기 바랍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신앙을 지키려고하는데는 반드시 자기 행위의 도덕성을 저울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행위의 의롭고 의롭지 못함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 곧 재창조를 무시하고 자기 의를 구원의 행위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아 난 열심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롬10:3) 것과 같은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딤후1:9)라고 말합니다. 거듭 거듭 말씀합니다만, 율법과 도덕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만 창조와 부활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영원한 복음을 창조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정립하라는 기별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속죄를 도덕적, 율법적 죄에 대한 속죄로 강조해 오면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기 위하여 영혼불멸설에 근거한 영원 형벌설, 곧 영원 지옥설을 설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종교이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하신 종교는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의 종교는 창조와 부활 곧 재창조의 종교입니다. 그의 창조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 천사의 기별은 속죄적 관점의 복음에서 제창조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기별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 안에 머물러서 영원히 존재하며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속죄의 복음은 치료의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치료자인 구주를 은인(恩人)으로 여기고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창조의 복음은 존재와 생명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구주를 은인으로 여길 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으로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순종하게 합니다. 그분이 나를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윤리적 표현으로 말할 때에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이것은 창조의 복음이며 동시에 속죄적 복음입니다. 그러나 속죄만 강조하면 다만 은인으로 대접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는 전적인 복종은 크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죽을 병에서 살려준 용한 의원으로 믿게 하며 은인으로 대접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는데 의미를 별로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서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도덕적 행위의 종교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래서 무수한 종교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마다 그들이 믿는 신을 최고의 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신들은 힘의 신이요 신에게 잘하면 상주고 신에게 잘못하면 벌주는 그런 신들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사람의 도덕성이 만들어 놓은 신입니다. 사람들은 잘하면 상주고 잘못하면 벌주는 것을 인간을 도덕적으로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상필벌(信賞必罰) 주의는 아주 좋은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름하신 분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해 주시는 신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면서 신상필벌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어 인간 행위에 따라 심판하여 지옥과 천당으로 보내는 하나님으로 가르쳐 온 교회의 오해를, 창조의 관점에서 창조와 재창조의 하나님으로 깨달아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르게 경배하는 것이 존재와 생명의 복음이 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기별인 것입니다. 재창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속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죄를 통하여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결국 진정한 속죄의 기별은 재창조의 기별인 것입니다. 

2. 복음과 의

 세 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인격, 공로, 인간 가족들에게 행하신 변함없는 사랑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으므로 그분은 인간들에게 풍성한 은사를 나누어주시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분 자신의 의를 속절없는 인간 대리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하신 기별이다. 이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이 기별은 큰소리로 전파되고, 크나큰 성령의 부어지심이 수반될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06p. 서울 시조사 간. 1993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냐고 물어 왔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하여 '넓은 의미에 있어서 셋째 천사의 기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고 하였다"(COR 64p. Review & Herald 1890년 4월 1일, 예언의 신 개요 연구 하권 26p.).

 셋째 천사의 기별 더 넓게 말해서 세 천사의 기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기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되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장은 하지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궁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과 의는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복음을 선포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일은 쉬운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와 부활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의가 창조로 말미암는 것이 확실하다면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은 의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심판이 되며, 창조를 거절하는 결과가 무너지는 바벨론이 되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를 거절한 종국적 결과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아서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영원히 돌아가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며, 의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진정으로 고백하면 그가 의에 이른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이 새로운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현인 것입니다.

3. 의와 안식일 

 태초부터 하나님은 창조로 의를 나타내셨고, 그 의를 거절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곧 재창조로 의를 다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 곧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거하라는 기별이며, 이 창조 안에 거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와 재창조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해 준 생명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뜻이며, 그것은 전에는 존재가 아니더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로 말미암아 재창조되어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의 첫째 특징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숨을 쉽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의의 사람들은 참 생명의 호흡 곧 의의 호흡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들어봅시다.

출23: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숨을 돌리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파쉬(  )"인데 숨쉰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여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게 지키도록 허락된 하나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창조된 사람들은 이 날을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확인하는 날로 지키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한 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존재 증거의 날입니다. 그 존재는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 날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호흡하는 날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겔20:19~2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그러나 그 자손이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좇지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는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내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내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으나.

 안식일은 율법이 아니라 중생한 참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생명입니다. 중생의 생명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안식일의 호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생명과 존재를 부여받고 그를 의지하여 살며 기동하며 있는 것(행17:28)을 증거 하는 표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여호와를 아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절대적으로 믿음으로 그 행하신 일 안에 머무는 것을 생활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생활은 호흡 있는 자의 자연스런 활동이 아닙니까?
 사실 안식일 계명인 제 4 계명에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백성의 생명으로 주셨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계명은 창세기 2:2,3에서 왔습니다.

창2:2,3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말씀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오복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팔 복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복의 정의는 아닙니다.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복은 이렇습니다.

시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바로 생명 곧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이 날이 생명적 요소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으면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시므로 모든 것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기념입니다. 그것은 곧 있는 것과 생명에 대한 기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가진 있는 것들은 이 날에 자기를 생명으로 있게 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과 여호와로 말미암아 생명은 유지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생명 가진 자의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그와 관련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누리며 자기의 생명이 생명의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감사와 경배로 고백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생명이 영속되며 더 풍성하여진다는 것을 믿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하신 일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행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8~11)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엿새 동안 하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할 일이 전혀 없고 다만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재창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의를 말할 때에 안식일 계명에 사용한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한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롬4:4~6)라고 하여 "일을 아니할지라도"와 "일한 것이 없이"라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제4계명에 있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드러난 것이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람이 행할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생활로 드러내는 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적 도덕적 행위로 자기가 일해야 할 것을 보이는 도덕적 종교와 도덕적인 세상에, 하나님이 다 행하셨으므로 우리가 일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절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안식일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창조와 재창조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기별이 아닙니까? 그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그 시초에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음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요, 생명이시며, 그래서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와 생명을 나타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에 숨을 쉰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쉼이 있는 날이며 사람이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증거 하는 날인 것입니다.

요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마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쉼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쉼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모든 수고를 그치게 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다 하신 것을 감사하게 하는 날이며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경배를 드리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은 오직 산 자들만 할 수 있는 생명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창조주를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천사의 기별은 이 창조의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치며, 경배를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계시합니다. 생명이 없는 자들은 바벨론이요, 불에 타는 마른나무들일 뿐입니다(요15:6).

사38:18,19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식에게 알게 하리이다. 

 십계명을 크게 나누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나누셨습니다.

마22:36~40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런데 이것을 성경의 신론(神論)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성부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 1 계명부터 제 3 계명까지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경배와 관련된 기별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성령님도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를 받아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삼위 신론으로 십계명을 분류해 보면 이 첫 부분은 성부에게 해당되는 면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부분은 성령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 5 계명부터 제 10 계명까지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랑하라는 계명들인데,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의 역사(役事)를 나타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론인데, 성령으로 사는 자라야 사랑의 생활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넷째 계명뿐이지요? 이 넷째 계명 곧 안식일 계명은 성자론입니다. 이 안식일에는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함께 만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된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이 날에 만나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주와 피조물인 사람이 만나는 시간의 경배의 전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을 시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한 것을 받아 감사함으로 누리면서 그에게 경배 드릴 것 밖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을 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이 도무지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화목 제물이 되어 오셔서 그 안에서 다시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하시려고 친히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신(마1:23)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은 바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믿는 믿음을 생활로 증거 하는 것이며, 참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성자론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제 1 계명부터 제 3 계명, 그리고 제 5 계명부터 제 10 계명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도 안식일 계명에 명기 되어 있는데, 일은 신자들의 활동입니다. 이 활동하는 생활이 사랑의 봉사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재창조된 생명을 소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창조의 생명을 소유한 사실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믿음의 절정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표라고 분명히 계시합니다.

겔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또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므로 중생의 생명은 날로 풍성하여지고 날로 새로워지는 경험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항상 연결된 생명을 호흡하기 때문입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날로 새롭다는 것은 시간 세계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 세계에서 말하는 영원의 개념입니다.
 시간 세계에는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날로 낡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겉 사람은 후패(朽敗)한다고 말합니다. 후패한다는 것은 낡고 사그라진다는 말입니다. 곧 시간 세계에 속한 것은 낡고 사그라지지만 영생의 생명인 중생한 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시간적인 사실로 표현한다면 날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의 동산 곧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시간이 없어지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날로 새롭다는 것은 시간을 정복한다는 말입니다. 시간을 정복하는 삶, 이것이 중생의 생명의 삶이요 새로운 피조물의 특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입니다.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정복한 것이라고 나는 정의합니다.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복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시간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예한 자들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사망의 세계의 도덕과 윤리와 아담의 후손의 종교적 원리를 주장하면서 창조주 여호와를 아는 표를 지키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즉 안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망으로 가는 길에는 쉼이 없습니다.
 세 천사의 기별은 쉼과 쉬지 못함의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쉼이 있는 자는 숨을 쉬는 자들이고, 쉼이 없는 자들은 숨을 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쉼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또 거룩은 죽은 자에 대하여 산 자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거룩한 자 곧 산 자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겔20: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거듭난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면 거룩한 자입니다. 즉 성화된 자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 성화를 더럽히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평생 사업이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지켜야 할 과업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숨을 쉽니다. 사람뿐만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숨을 쉽니다. 그것이 죽었나, 살았나 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호흡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까? 호흡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호흡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공언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호흡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중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 있다면 이 생명의 호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명의 호흡을 하는 사람은 썩지 않습니다. 썩을 수 없습니다. 그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쉬는 것은 썩지 않습니다. 숨을 쉰다는 것 그것은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