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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위대한 노년 (단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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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 2,889 2001-08-31 06:13
제7장 위대한 노년(老年) (다니엘서 6장)

1.메대 제국의 역사적 배경과 다리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 (단 5:31, 6:1).


전장인 5장의 마지막 절(31절)은 6장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출판된 히브리 성경에는 그것이 6장 1절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장절의 구분 여하에 관계 없이 메대 제국의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 대왕과 함께 6장의 배경을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니엘의 경험과 연관짓기 전에 메대와 다리오 왕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한 페르샤의 초기 역사와 고레스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가.메대 제국과 페르샤의 초기 역사
메대(the Medes)는 민족 이름이고 메디아(Media)는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메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야벳의 아들 마대(Madai)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0:2, 대상 1:5), 페르샤와 함께 인도-유럽족(Indo-European)에 속한다. 이들은 페르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인 이란고원(高原)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 혹은 지금의 이란(Iran)으로 1935년부터 불려지고 있다.
이들 메대 족속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9세기 중엽인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III세(859-824 BC) 때부터인데 그후로는 계속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거듭거듭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고, 북방 이스라엘이 망한 후 포로된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메대의 여러 도시들로 강제로 이주되기도 했다(왕하 17:6, 18:11).
헤로도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에 데이코스(Deikos·혹은 c. 700 - c. 647 BC)가 일어나 메대 족속들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Ecbatana)를 수도로 정하였다.
데이코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파라오르테스(Pharaortes)가 22 년간(c.647 - 625)다스렸는데, 이 때 그들 남쪽에 있던 페르샤족을 복종시켰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르테스의 아들인 시악사레스(Cyaxares I)가 즉위하여 약 40년간(c. 625 - c.585) 다스렸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넘어뜨리기 위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바벨론의 나보포랏살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정복한 앗시리아의 영토는 양분하여 티그리스강 동쪽과 북쪽은 메대가 차지하고, 바벨론은 이 자연적인 경계선의 서쪽과 남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王室)혼인이 이루어져, 시악사레스(1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 아미티스(Amytis)가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그 후 시악사레스는 소아시아의 스키디아(Scythians)족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에는 리디아와도 접전했으나, 그해 5월 28일 일식(日飾)이 일어나자 서로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시악사레스 1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즉위하여 약 35년간(c. 585 - c. 550) 다스렸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의 외조부라고 전한다. 역사가 헤로도터스에 의하면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대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안산(Anshan)에 있는 그의 페르샤의 봉신왕(封臣王)인 캄비세스 I세(Cambyses I c.600 - 559)에게 멀찍이 시집 보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페르샤의 국부(國父)인 고레스 대왕(Cyrus II 558-530 BC)인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12세 되었을 때,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는 딸과 외손자를 불러들였는데 어머니가 귀국한 뒤에도 고레스는 메대에 남아서 외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은 그가 장차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한 때 외조부에 의해 고레스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착수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레스에 의하여 도전받게 되었다.
기원전 553년 고레스는 종주국(宗主國)인 메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에 도전했다. 처음 두번은 패했지만, 세번 째 싸움에서 메대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550년 고레스는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아스티아게스도 사로잡았으나 선대(善待)하여 저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 장관으로 보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본래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두 왕가가 왕실 결혼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한 나라 같았기 때문에 급격한 정변(政變)은 없었고,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정권이 교체된데 불과했다. 단지 페르샤의 귀족들이 정부 요직(要職)에 대거 진출한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역시 유능한 메대 사람들도 여전히 기용되었다.
고레스는 메대 사람들에게 유화(宥和)정책을 써서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아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Gubaru), 혹은 희랍어로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벨론에 진입(進入)했고,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입성했다.

나.다리오의 신원
그렇다면 바벨론이 함락된 후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62세]라 하였고(단 5:31),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다니엘을 총리로 기용한 그 다리오는 누구인가(단 6:1). 다리오의 신원에 관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추론이 있어 왔다. 다음과 같은 윤곽을 기초로 그의 신분을 확인해 보자.


1)성경상의 진술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단 9:1).
벨사살이 죽던 밤에 나라를 "얻었"으며(단 5:31),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단 9:1).

가계(家系)는 메대족이었다(단 5:31, 9:1, 11:1).

바벨론이 멸망하던 기원전 539년에 그의 나이는 약 62세였다(단 5:31).

그의 통치 첫 해에 관해서만 언급되어 있다(단 9:1, 2, 11:1).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다니엘을 세 총리 중 수석총리로 임명했다.

2)고대 역사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아래와 같이 썼다.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희랍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메대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시악사레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와 남매 관계이기 때문에 고레스에게는 숙부가 된다. 고레스는 어린 시절 외조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의 궁전에서 자랐기 때문에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와는 친숙하였다.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뒤 그는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의 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은 결혼선물(dowry)로 나라(메대)를 사위에게 주었다.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레스는 자신이 메대를 복종시켰을지라도, 메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명목상,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를 메대 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함락한 다음에는 그를 장인으로 삼아 당시 나이가 약 40세 안팎인 자기에 비해 이미 노년에 접어든 62세의 장인을 잠시 바벨론의 명예 왕으로 앉힐 수 있었다.
3) E.G White 의 진술
메대 사람 다리오의 조카였다(선지자와 왕, 500).

고레스는 메대와 페르샤 연합군의 총 사령관이었다(상동).

다리오는 메대의 군주였다(상동, 532).

다리오는 바벨론이 함락된지 약 2년 이내에 죽고 고레스가 계승했다(상동).
이상에 비추어 볼 때, 5장 31절과 6장의 다리오는 시악사레스 2세 임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을 다리오(Darius)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다리오(Darius)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인 이름이 아니라, 여러 왕들에 의해 채택된 통칭(通稱)인 보통 명사로 "정복자"(Subduer)를 뜻하는 말이요 보좌 명칭(Throne name)이라고 한다.또한 다리오를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이라고 했는데(9:1), 이 곳의 아들은 손자나 더 먼 자손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음이 밝혀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6장의 다리오는 고레스의 숙부요, 장인인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일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페르샤에 대하여는 7장에서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의 신원에 관한 견해들
다니엘서 5장 31절, 9장 1절, 11장 1절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물론 잘 알려진 페르샤의 세번 째 왕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와는 다른 사람이다. 언급된 이름들로는 고레스가 정복한 메대의 왕이요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요 고레스의 숙부이며 장인이기도 한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 고레스(Cyrus) 자신,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고레스의 장군으로 그보다 두 주일 반 앞서 바벨론에 입성한 구바루(Gubaru, 혹은 Ugbaru, 헬라어 표기로 Gobryas로도 부름) 등이다.

이 여러 후보 가운데 성경의 기사를 모두 충족시키는 역사적 인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시악사레스 2세와 구바루로 압축되어 왔었다. 실제로 기원전 539년 10월 바벨론을 함락시킨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가 유망하여 윌리암 쉐이(William H. Shea)나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그 가능성을 택했다.그러나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가 출판된 이후 다시 연구된 대영 박물관의 쐐기문자 본문에 의하면 당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의 섭정 연대 해석에 차질이 있음과 함께 구바루의 사망 날짜도 잘못 이해되었음이 발견되어 윌리암 쉐이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 가지 새로운 이해를 곁들여 그는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를 다름 아닌 고레스 자신이라 하고 "다리오"는 물려진 "보좌 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 가운데서 본서는 이 문제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술에 몇 가지 미흡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악사레스 2세가 다리오의 신원에 보다 적합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리오가 이들 가운데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신빙성이나 중요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계속하여 더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