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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바벨론의 멸망 (단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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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 3,760 2001-08-31 10:19
제 6 장 바벨론의 멸망 (다니엘서 5장)

1.멸망까지의 역사적 배경

가.바벨론의 신원(身元) 확인
다니엘서 5장은 여러 해 전까지만 해도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는 비평가들에 의하여 가장 혹독한 공격을 받았던 부분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5장의 주인공인 벨사살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아닐 뿐더러 역사에도 없는 가공(架空)인물로 여겨져 성경이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증거처럼 주장돼 왔다.

그러나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가 대영제국 박물관에 수집돼 있던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Verse Account of Nabonidus)가 출판됨으로써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다(본서 총론 II. 다. 참조). 본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한 진영(陳營)을 그의 맏 아들의 책임 아래 두었다. 그는 군대를 그와 함께 보냈다. 그는 그와 협정 맺고 그에게 왕권(Kingship)을 위탁했다. 자신이 머나먼 여행으로 떠나 있는 동안 . . . 아무루(Amurru)에 있는 데마(Tema)로 그의 얼굴을 향했다. 옛적에 가 보지 않았던 길, 먼 여행 길을 그는 떠났다. 그들은 검으로 테마 왕을 죽였다. . 그는 그 도시를 단장했고,그는 그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 도시를 바벨론 궁궐처럼 만들었다.]

발견된 당대 여러 문서들을 종합해 보면 벨사살은 부왕인 나보니더스 3년에 이미 왕권을 위임받았으며 바벨론성 군대의 통수권을 받았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보니더스가 북부 아라비아의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던 때였다. 나보니더스는 테마를 정복한 후 이를 재건하여 그의 거주지로 삼아 약 10년 간이나 틈틈이 거기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바벨론의 모든 공식적인 국무(國務)는 벨사살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의 위조문서라고 우기던 고등비평가들을 헤어나올 길 없는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런 궁지에 몰린 하바드 대학교의 파이퍼(R. H. Pheiffer)교수는 아래와 같은 말로 난처해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저자(다니엘서의 저자)가 어떻게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만 나오는 벨사살이, 다니엘서와 다니엘서에 근거한 바룩서 1장 11절에 나오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했을 당시 왕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기록했는지 추측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고고학에 의한 벨사살의 신원 조회 확인 결과는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찬란한 승리에 속하고 있다.


나.함락 당시의 바벨론 왕
바벨론이 함락되던 날 밤, 바벨론성에는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다(5:1). 때에 부왕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바벨론 본성(本城)에는 벨사살 밖에 없었는가. 보다 구체적인 기사가 발견된 "나보니더스의 연대기" (The Nabonidus Chronicle)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 7년에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대신 (大臣)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카드(Akkad)에 (있었다). . . .제 9년 왕 나보니더스는 테마에(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대신들, 군대는 아카드에 (있었다). 니산월(Nisan)에 왕은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나부(Nabu)신은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벨(Bel)신은 에사길라(Esagila·신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신년 축제는 생략되었다. ……제 10년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나보니더스는 기원전 556년부터 539년까지 왕위에 있었고 그의 아들 벨사살은 부왕의 재위 3년 째부터 섭정왕(攝政王)으로 부임한 것으로 생각하면 기원전 553년부터 539년까지 재위한 셈이다. 나보니더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기간 중 나보니더스는 그의 재위 7년 (549 BC), 9년(547 BC), 10년(546 BC) 그리고 11년(545 BC)에는 테마에 있었고, 바벨론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에 의하면 나보니더스는 그의 재위 17년인 기원전 539년 바벨론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고레스의 군대가 바벨론을 함락시키기 몇 주일 전, 티스리월(Tishri·10월)에 바벨론에서 빠져나왔음이 나보니더스의 연대기에 적혀 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함락되던 당시 성내에는 다니엘서 5장의 기록처럼 벨사살 왕만 있었고 그 만 죽임을 당한 것이다(5:30). 이 얼마나 성경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역사적 고증(考證)인가. 나보니더스는 어떻게 되었는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여 인용된 바빌로니아의 역사가 베로수스(Berosus)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보니더스가 그의 재위 17년에 이르렀을 때, 고레스(키루스)가 대군을 이 끌고 페르시아에서 나왔다. 그는 이미 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나서 바빌로니아를 향해 급히 쳐들어왔다. 나보니더스는 그가(고레스) 자기를 공격해 오고 있음을 알고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그와 마주쳐 그와 더불어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군대 중 소수만을 데리고 보르시파(Borsippa)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아버렸다. 이에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했고, 그 성의 외각 성벽들을 헐어버려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그 성은 그에게 매우 두통거림임이 입증되었으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 상당한 댓가를 치뤄야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고레스)는 나보니더스를 포위하기 위해 보르시파로 진격했다. 그러나 나보니더스는 포위하기 위해 보르시파로 진격했다. 그러나 나보니더스는 포위에 버티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고레스)에게 투항했다. 그는 처음에 고레스에 의해 친절하게 취급되다가 그가 거하여 살 장소로 카르마니아(Carmania)를 받고 바빌로니아를 떠나갔다.]


다.느브갓네살에서 벨사살까지
우리는 앞서 4장에서 느브갓네살의 기사를 대한 뒤 5장에서 바로 느브갓네살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는 벨사살을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대하게 된다(5:18, 22). 느브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벨사살과의 관계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총론 III. 나. 참조). 이를 간단히 개략하면 아래와같다.

느브갓네살은 43년 간 다스린 뒤 4장의 사건 후인 기원전 562년 10월 초에 죽었다.
그의 무능하고 악한 아들 아멜 마르둑 (성경의 에월므로닥)이 재위 2년 만에 모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렘 52:31-34, 왕하 25:27-30).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반역을 주도한 네르갈샤르우스가 4년간 다스렸다(렘 39:3, 13)
다음에는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즉위했으나 2개월 만에 느브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더스를 지지하는 모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556 BC).
어머니를 통하여 느브갓네살의 의붓 아들이 되기도 하고 부인을 통하여 그의 사위가 되기도 하는 나보니더스는 정치나 군사 문제보다는 종교와 고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문약(文弱)한 군주였다(총론 III. 나. 나보니더스 참조).
그는 신병(身病)등 이런 저런 이유로 바벨론성을 떠나 있으면서 정치문제를 등한하여 바벨론의 지배계급에게 소외당하고 있었다. 특히 신전들에 막대한 수익(收益)을 올리게 해주는 신년 축제의식을 여러 번 생략함으로써 제사장 계급들과 반목이 심했다. 더우기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보다 자기와 자기 어머니가 이전에 섬기던 하란의 월신(月神)인 신(Sin)을 높임으로써 더욱 그랬다.
그는 기원전 553년 동부 팔레스틴 정복에 나선 동안 와병(臥病)하여 병 회복을 위해 레바논으로 가서 요양하였다. 이 때 맏아들 벨사살이 섭정(攝政)하기 시작하였으며 552년부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그랬으므로 그가 벽 위에 나타난 글자를 해석한 다니엘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자리는 첫번째의 아버지와 두번째인 자신을 제외한 "세째 치리자"의 자리였음이 명백해진다(5:16).
병에서 회복된 후 나보니더스는 서북 아라비아 정복에 나서 오아시스인 테마(Tema)를 빼앗고 기원전 545년까지 때때로 거기 머물러 살았다. 수도 바벨론성에는 아들 벨사살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라.느브갓네살과 벨사살의 관계
다니엘은 벽 위에 쓰인 글자를 해독(解讀)하라는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벨사살 왕을 정면으로 견책하면서 "왕의 부친 느브갓네살"(5:18)이라는 말과 "왕은 그(느브갓네살)의 아들이 되어서"(5:22)라는 표현을 썼다. 어떻게 이러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가?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의 세밀한 고증(考證)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아랍과 바빌로니아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들"이란 말이 "손자" 혹은 "양자"를 비롯하여 적어도 열 두 가지 이상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말도 "조상" (ancestor)을 비롯하여 "조부", "증조부", "고조부", 그 이상도 가리키는 등 적어도 일곱 가지 용법을 지녔었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앗시리아의 비문에도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왕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썼다. 두 사이에는 아무런 혈족관계가 없고, 오히려 예후는 오므리의 집안을 멸족(滅族)한 인물이었다(왕하 9:10).

벨사살의 경우 느브갓네살의 딸인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느브갓네살의 외손자일 수도 있고 느브갓네살의 의붓 아들인 그의 아버지 나보니더스를 통하여 손자(의붓)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앞서의 예처럼 단순히 선왕(先王)의 관계에서 그렇게 불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