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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불의 시련과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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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 2,671 2001-08-31 10:39
4. 풀무 불의 시련과 승리

가. 촛점이 된 세 젊은이
이러한 분위기와 상황에서 감히 신상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벨론 국립 관현악단의 장엄한 음악에 맞춰 느브갓네살 자신을 비롯하여 참집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격식을 갖추어 엎드렸으나 오직 히브리의 세 젊은이만이 그 대로 우뚝 서 있었다. 이들의 반역적인 행위가 이러한 일이 있을 줄로 예기했던 바벨론의 지배 계급인 갈대아인 몇 명에 의해 즉시 왕에게 고소되었다(3:8-13).

그 날 그 행사의 촛점은 금 신상이었으며 허다한 참배자들 가운데 유야무야한 이들 세 히브리인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들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갑자기 이들 세 젊은이가 이날 행사의 실제적인 표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 그리고 이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적대자들이 최고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금 신상이 아니었으며 다수의 일반 참배자도 아니었고 바로 참 하나님을 대표하는 히브리 청년들, 특히 그들의 의지가 표현되는 무릎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롬 11:3,4) 어떠한 환경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하늘의 영웅들이기 때문이다(삿 7:5-7). 이토록 장엄한 자리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감히 왕의 직접적인 명령을 어긴 자들에 대한 왕의 분노는 격발되었으나 히브리 포로들에 관해 이전에 받았던 인상과(1:19-21), 인연 때문에(2:48, 49)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바야흐로 제막식의 촛점은 눈을 어리게 하는 치솟은 금 신상으로부터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벧전 1:7) 신앙으로 새겨진 하나님 형상의 세 젊은이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나. 진정한 신앙고백
「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3:16, 17).


1. 뜻을 정한 젊은이들
풀무처럼 달아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 앞에서 세 친구가 말한 침착한 대답이다.

"왕이시여, 이 문제에 대하여는 저희가 달리 드릴 말씀도 없고 달리 취할 행동도 없습니다. 지금 취한 이 처신이 확고하고도 최종적인 것입니다. 왕이시여, 왕의 명령을 좇아 우상에게 경배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토론이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을 빌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내용이 될 것이다. 왕 앞에서 이토록 담담하게 최후의 진술을 하고 있는 세 젊은이의 심중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뿌리 깊은 감회가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시여, 우리가 이 어린 나이들에 부모님 곁 정든 고국에 살지 못하고 이처럼 타향 만리 이국 땅에 포로가 되어 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며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나라의 속담에도 있듯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슬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렘 31:29).

젊은 꿈이 한껏 부푼 나이에 정든 고향, 그리운 부모님과 가족의 곁을 떠나 이 곳으로 잡혀 오던 그 괴롭고 가장 길었던 여름, 우리 몇 사람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결심을 했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더욱 떳떳하고 후회가 없는 길임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와 우리 어른들의 경험에서 충분히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 뼈 아픈 민족의 비극을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이 비극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극의 막을 내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계명입니다(출 20:3). 우리의 패역한 조상들처럼 또 다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계명입니다(출 20:4, 5).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뿐만 아니라 극렬히 타는 풀무불을 내세우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에게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내시리이다"(3:17). 히브리 젊은이들은 100여년전 이러한 때를 위한 이사야 선지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구속자임이라] (이사야 43:1-3).


2. 영원한 신앙고백
풀무불이면 모든 것을 끝장내리라고 생각했던 왕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왕보다, 바벨론의 신보다, 더 높고 능력이 더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선언함으로써 바벨론의 권위는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잇는 세 젊은이의 다음 번 선언은 참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의 극치였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아옵소서"(But if not, be it known to you, O king).

이 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왕에게서나 풀무불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그냥 죽게 되더라도, 풀무불에서 사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길이어서, 설사 우리가 죽게 된다 해도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조건 없는 절대 순종의 고상한 모본으로 결과를 묻지 않고 부르심에 응한 아브라함의 신앙(히 11:8)을 방불하게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일 을 해 주시면"(If , then ) "내가 을 하겠나이다"라는 팥죽 장사하던 야곱의 실리주의(實利主義)적인 조건부 신앙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처럼(수 24:14, 15),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시 57:7, 시 108편)라고 부르짖어야 하겠다. 그리고 에스라의 고백처럼(라 7:10),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 10:10) 신앙 경험이 절실하다.

동방 교회 최대의 설교자로 불리우는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 407)은 젊었을 때 황제 앞에 서서 그의 신앙을 취소하라는 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때에 이러한 문답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고집한다면, 나는 너를 네 조국으로부터 좇아 내고 말겠다."
"황제 폐하, 그러실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내 아버지(하나님)의 땅이 올시다."
"그렇다면 나는 네 재산을 몰수해 버리겠다."
"그렇게도 못하십니다. 제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럴진대 내 너를 말조차 나눌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쫓아 보내겠다."
"그것도 안 되십니다. 제게는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나 의 형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모실 것입니다."
황제는 분통이 나서 소리쳤다.
"네 생명을 끊어 버리겠다."
"그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제 생명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 어있습니다."


세 젊은이의 모본에서 우리는 장차 같은 경험을 가지게 될 남은 백성의 특성을 본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일찌기 패해 본 적이 없고 정복하지 못한 나라가 없으며 굴복시키지 못한 왕이 없는 느브갓네살은 이제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용사들을 대한 것이다. 일찌기 세 젊은이들의 이름을 우상숭배에 맞춰 고칠 수는 있었어도 그들의 신앙은 바꿀 수가 없었다.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 불도 왕의 분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세 젊은이는 옷을 입은 채 결박되어 급히 불 속에 던져졌는데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세 사람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3:22, 23).


다. 불 속의 하나님
가시지 않는 분으로 씨근거리던 왕은 차라리 감탄해야 마땅한 용기로 최후까지 그토록 당돌하던 세 젊은이의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 멀찌감치서 풀무의 아구를 통해 내부를 드려다 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갑자기 왕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며 보좌관들을 불렀다. 분명히 세 사람을 결박해서 던졌는데 어찌된 일인가. 왕은 부르짖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 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단 3:25).


우선 결박된 채 던져진 세 젊은이가 불 속에서 자유롭게 활보를 하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기적 외에 더욱 경악할만한 기적은 신의 아들로 보이는 거룩한 존재 곧 네째가 거기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이교의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그와 같은지 알았을까. 바벨론에서 신임받는 자리를 차지한 히브리 포로들은 생애와 품성으로 진리를 왕 앞에 드러냈다 분명하고 단순하게 그들은 의의 원칙들을 제시하였고 이리하여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가르쳤다. 그들이 오실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으므로 불 가운데 있는 네째의 모습에서 왕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 보았다] (선지자와 왕, 487).


하나님은 불이시다(히 12:29, 신 4:24). 하나님께서는 불꽃 속, 죽음을 불사하고 불 속으로 뛰어든 그분의 사랑스러운 종들과 함께 그 분의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불 속의 현현(顯現; theophany)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주자주 불로서 그 분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신다.


불 속에 임재하심(presence) 출 3:1-4
불로 갈 길을 나타내심(pathway) 출 13:21
불 속에서 교훈하심(percepts) 출 19:16-18
불로 징벌하심(punishment) 창 19:23, 24 레 10:2
불로 능력을 드러내심(power) 왕상 18:24
불 가운데서 보호하심(protection) 단 3:25
불로 이루어질 예언(prophecy) 살후 1:6-10, 벧후 3:10, 눅 17:29


느브갓네살은 바로 불 속에 나타나셔서(3:25), 불 속에서 그 종들을 보호하시고(3:25), 불로 징벌하시며(3:22), 불로 능력을 나타내신(3:27) 하나님을 체험했으며 그 하나님을 서슴치 않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3:26)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세 젊은이의 고백대로 그것이 그분의 섭리일진대 그들을 능히 불 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심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함을 실증했다(히 11:33). 본 교단의 고고학의 권위자인 시그프리드 호온(Siegfried H. Horn) 박사는 당시의 풀무를 상기시켜 주는 생생한 배경을 아래와 같이 들려 주고 있다.


[바벨론 근방에는 벽돌 가마들이 있다. 최근에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벽돌 가마들이 뿜어내는 연기로 검게 뒤덮인 하늘을 보았다. 나와 동행한 친구 하나가 나를 그 중 한 벽돌가마로 안내하여 주어서 나는 그런 벽돌 가마의 구조와 불태우는 방법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들 벽돌 가마가 벽돌로 지은 원추형(쇠뿔모양)의 구조임을 발견하였는데 안쪽에는 굽지 않은 벽돌들을 굽기 위해 줄줄히 쌓아 놓은 것을 보았다. 벽 한 쪽에는 아구가 있었는데 나는 한 사람이 맨 손으로 불꽃을 계속 돋우기 위해 원유(原油)와 겨를 섞은 것을 퍼 넣는 모습을 보았다. 때때로 그 사람은 앞 이마의 땀을 씻기 위해 쉬는 때 에 우리는 이 아구를 통해 벽돌 가마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강렬한 불꽃이 벽돌을 달구어 백열광을 내게 하는 것과 실제로는 어떤 곳에서는 진흙이 녹아내려 흐르게 하기까지 했다.

나는 느브갓네살이 이러한 벽돌 가마를 써서 신실한 세 히브리인을 벌하려 했었음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이락에서 벽돌 가마를 달구는 방법을 보고난 뒤 나는 어떻게 벽돌 가마를 평시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메소포타미아의 노천(露天) 유전(油田)들에서 언제나 넉넉히 공급되는 원유를 좀 더 퍼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절할 것인가 불탈 것인가"(bow or burn)의 갈림길에서 세 젊은이가 내린 결정은 하나님과 신앙과 순종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優先)임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영국 성공회의 목사로 1차 대전 당시 군목으로 종군한 스튜데르트케네디 목사는 프랑스의 참호에서 그의 아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나는 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기도 드림에 있어 배우기를 바라는 첫번째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안전히 지켜 주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용감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가 해야 할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를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드리기를 바란다. 사는가 죽는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다. 죽은 아버지도 여전히 아버지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지 못한 아버지는 말하기조차 꺼려지는 두려운 것이다. 나는 너나 네 엄마가 나의 안전을 어느 정도라도 포함시키기를 원하는 줄로 안다. 좋다, 그렇게 하려므나. 그렇더라도 그 문제는 나중에 항상 나중에 두거라. 왜냐하면 그건 정말로 그토록 절실한게 아니거든.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누구든지 기도에 있어서 평화시에나 전쟁시에라도 먼저 것을 먼저 두기를 배워야 한다. 내가 믿기로는 그 점이 바로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점이거든.]


이 어려운 교훈을 히브리 세 젊은이는 행동으로 옮겼으며 그 결과는 느브갓네살의 고백으로 나타났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 3:28).